책을 읽는다는 것은 나와 타인,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 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는가?” 최근 한 텔레비전 대담 프로그램에 나온 뮤지션 박진영에게 진행자가 던졌다는 질문이다. 어둠 속에서 느닷없이 날아든 주먹과도 같은 이 종류의 돌발 질문에 얼른 대답할 말을 평소 우리는 준비하고 다니지 않는다. 그런데 박진영은 대답했다고 한다. “춤추러 왔다.” 이것이 그의 준비된 대답이었는지 한 순간의 빛나는 순발력의 산물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느 쪽이었든 그 답변의 섬광은 박수갈채를 받을 만하다. 준비된 대답이었다면 박진영은 “내가 이 지구에 왜 왔지?”를 그 자신의 평소 질문으로 가지고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순간적 응답이었대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자기 자신을 향해 한 번도 그런 질문을 던져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그가 벼락의 신이 아닌 한 그 입에서 그런 번개 같은 답변이 나오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오늘은 신묘년 새해 첫날이다. 정월 정초는 우리가 두 개의 얼굴로 두 개의 시간을 경험하는 지점이다. 얼굴 하나는 우리가 막 떠나보낸 어제 이전의 한 해를 돌아보고 있고, 다른 하나는 아직 오지 않은, 그러나 뚜벅뚜벅 우리를 향해 어김없이 걸어오고 있는 내일 이후의 한 해를 마주보고 있다. 지나간 한 해는 우리가 살았기 때문에 ‘아는’ 시간이고, 다가오는 한 해는 아직 살지 않았으므로 ‘모르는’ 시간이다.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얼굴은, 모든 정든 것들과 작별하는 사람의 표정처럼 아쉬움과 미련과 섭섭함의 색조를 띠고 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마주보는 얼굴에는 낯선 것들과의 만남을 준비할 때처럼 두려움과 기대와 희망이 모자이크로 서려 있다. 그 아쉬움과 두려움 사이에서 돌아보는 얼굴과 내다보는 얼굴의 대화가 빚어내는 송구영신의 의식 하나가 흔히 ‘정초 작심’이라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나는 어떻게 살았던가라고 한 얼굴은 묻고, 다가오는 새해에 나는 어떻게 사는 것이 좋겠는가라고 다른 한 얼굴이 묻는다. 그리고 이야기 속의 용감한 아이처럼 우리는 그 두 얼굴의 대화로부터 정초 작심이라는 카드를 꺼내든다.
고백컨대, 나도 신년 작심을 위한 화두를 지난 연말부터 몰래몰래 준비해왔다는 비밀 하나를 여기 털어놓고 싶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당신은 이 지구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한 뮤지션의 대답(“춤추러 왔다”)이다. 나는 당신의 신년 작심이 어떤 내용의 것일지 알지 못한다. 당신에게는 일자리가 필요할지 모르고 더 많은 돈, 더 많은 사랑이, 더 큰 행복과 빛나는 성취가 필요할지 모른다.
나는 당신의 작심 내용을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 단 한 가지, 나는 당신의 신년 결의가 무엇이냐에 관계없이 그 작심이 당신의 ‘삶의 품위’와 ‘삶의 기쁨’을 높이는 데 기여하는 것이었으면 싶다. “나는 이 지구에 왜 왔는가”라는 질문은 우리가 비록 부대끼며 살아도 그 삶이 지녀야 할 품위를 생각하게 하고 “춤추러 왔다”는 대답은 우리가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그 삶에 기쁨이 있어야 한다는 요청의 절실함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한다.
몸으로 추는 춤만이 춤의 모두가 아니다. 몸의 춤이 있다면 마음의 춤, 영혼의 춤도 있다. 우리에게는 몸의 춤과 영혼의 춤이 모두 필요하다. 누구나 출 수 있는 것이 춤이다. 이것이 춤의 위대함이다. 자연의 생명 가진 모든 것들은 춤추며 살고 있고 춤으로 삶의 기쁨과 영광을 표현한다. 낙지도 춤추고 지렁이도 춤추고 청동오리도 춤춘다. 그런데 자연계의 모든 춤꾼들에게는 오만한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유독 인간만이 두 종류의 춤을 추거나 출 수 있다. 몸의 춤과 영혼의 춤이 그것이다. 인간의 춤이 몸의 춤, 영혼의 춤 어느 한 쪽으로만 기울면 춤은 일그러지고 반쪽 되고 삶의 영광은 쪼그라든다. 어느 쪽 춤도 출 수 없을 때 인간의 삶은 영광과 기쁨 모두를 상실한다.
우리가 영혼의 춤을 가장 잘 출 수 있는 것은 타인의 마음, 타인의 정신, 타인의 영혼을 만날 때이다. 이 만남의 소중한 순간을 제공하는 것이 ‘책읽기’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두 영혼의 만남이 일으키는 신명나는 춤판, 마음의 공동체가 벌이는 즐거운 무도회, 인간이 자기 존재를 들어 올리고 확장하는 사계절 축제이다. 거기에는 봄여름가을겨울이 따로 없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우리가 삶의 품위를 지키고 삶의 영광을 드러내는 소박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길이다.
~인문학자 도정일의 새해 에세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