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불리는 시기에 접어들면, 100여 년은 짐작할 수 있는 시간이다. 숫자로 내가 60년을 살았고, 나의 부모님과 부모님의 부모님, 내 자식들, 그리고 그의 자식들이 살아갈 시간까지 합하면 더 긴 시간도 가능하다. 물론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없다면 공들여 기억하려고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결이 아주 다른 책 세 권을 읽다가 시간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내가 살고 있는 이 시점에서 과거라 불리는, 그리고 미래라 불릴 제법 긴 시간을. 일본 문화 답사기는 천년도 넘는 세월을 짐작하게 하는 곳을 소개했고, 회령이라는 공간에서 현재의 화자가 증조할머니를, 할머니를 통해 만나 할머니와 엄마로 이어지는 100년도 넘는 이야기를 꾸린 소설 한 권, 그리고 대중매체에서 여성의 위상이 달라짐을 드러내는 콘텐츠를 말하고 있는 책을 묶어, 시간의 의미를 짚어 보려 한다.
1.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일본편 1 : 규슈』
유홍준 지음 ∣ 창비 ∣ 2020년(개정판) ∣ 340쪽
답사기 일본 편은 여행을 가기 위해 읽었다. 답사기지만 기대했던 정보보다는 일본과 한반도 연관에 대한 고증이 더 흥미로웠다. 고조선 한반도에 살던 이들이 2300년 전, 해류를 따라 흘러 들어간 규슈 지역에 벼농사를 지은 흔적, 그 후,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땅을 점령하다시피 해서 이룬 청동기 문화, 그리고 문화의 근간인 문자를 일본에 전한 왕인 박 등. 이처럼 일본 고대사는 한반도와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일본이 고대사를 왜곡해서 이를 감추려고 노력하고, 우리 역시 근대사 콤플렉스로 일본 문화와 우리 문화의 관계성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일본 규수를 가보면, 일본 규슈 땅이 우리와 참 닮았음을 느낄 것이다. 구마모토는 제주도를 연상시키고, 길가의 가로수로 있는 동백 역시 우리 남도의 동백을 떠올리게 했다. 규슈 지역 도시 후쿠오카, 구마모토, 벳푸, 유후인을 1997년에 가고, 이 책을 읽고 2025년, 올해 다시 그곳을 방문했다. 오래전 일본은 마을 구석구석이 너무 깨끗하고, 정돈되어 있어 살짝 주눅 들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음식값은 그 당시 우리 물가에 비해 매우 비싸고, 관광 인프라는 훌륭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은 그 오래전 관광지가 거의 변함이 없어 도리어 놀라웠다. 숙박을 제외한 음식값, 시설 사용료가 지금 우리나라에 비해 저렴해서 우리나라 성장이 상대적으로 크게 느껴진다. 『총, 균, 쇠』의 저자가 한국과 일본은 쌍둥이처럼 닮아있음을 언급할 정도로 우리와 일본은 고대사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가까운 사이다. 저자는 이런 일본과 우리가 일제의 침략(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에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었지만, 삼국시대를 일본과 가야를 포함해서 오 국시대로 봐야 한다는 근거로, 일본의 한국 문화 유적을 언급한다. 일본의 고대사 왜곡은 한반도가 일본에 영향을 주었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탓이고, 우리 근대사 왜곡 역시, 일제 점령기에 대한 분노, 또는 근대 문물의 유입을 일본의 공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피해의식 탓이다. 고증을 거쳐 드러난 진실을 외면하기엔 이미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한반도 영향을 받은 일본이 자신들의 문화를 어떻게 발전시켰으며, 우리 역시 일본 근대 문화를 받아들이고 우리 것으로 눈부시게 발전시켰음을 근거를 들어 언급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이제는 근대사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일본과 우리의 관계를 바로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까우니 부딪치고, 긴밀하니 더 깊게 상처받아, 남보다 못한 가족 관계의 깊게 곪은 상처는 자각 없이 쉽게 낫지 않는다. 억압받았던 기억을 잊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그 상처를 제대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일본 규슈 지역에서 백제의 향기를 느낄 수 있도록 쓴 답사기는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알게 하고, 이웃 나라 일본이 우리와 아주 비슷한 듯 다름을 이해시킨다. 그런 다름을 인정할 때, 일본 문화를 더 이해할 수 있고, 우리 문화에 대한 자부심도 더 높아질 수 있다. 23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한반도와 일본을 건강하게 바라보게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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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 344쪽
최은영의 소설은 타인의 삶을 통해 내 삶을 들여다보게 하고, 소설을 읽는 재미를 알게 한다. 『밝은 밤』은 화자 지연이 희령이라는 공간에서 할머니를 만나고, 할머니에게 전해 듣는 과거 시점의 이야기가 교차하며 전개된다. 증조할머니라는 단어가 수도 없이 나오는 이야기는 처음엔 좀 혼란스럽지만 193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증조할머니의 이야기는 지금 화자의 이야기로 이어지면서 할머니의 기억과 편지로 이야기되는 증조할머니의 삶은 현재 지연의 상황과 지연 엄마와의 관계, 그리고 다시 지연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로 시간을 오가며 전개된다.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시대를 넘나들면서도 자연스럽게 구분되는 전개로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듯 100년도 넘는 세월이 공존한다. 1930년, 백정의 딸로 태어나 환대받지 못한 삶을 살던 증조할머니가 ‘새비’ 아주머니를 만나 진정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모습, 그런 어머니를 사랑했던 할머니는 지금 지연의 엄마인 자신의 딸과 연을 끊으면서도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도 나온다. 각자의 기억 속에 있던 오래전 사람들이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하도록 다시 살아난다. 그리고 이 모든 이야기는 지금 어두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지연에게 다가온다. 각 시대를 산 네 명의 여성 이야기는 현재 지연의 삶 속에서 되살아나는 꼴이다. 흥미롭게도 이야기는 과거 또는 현재의 이야기로 고정되지 않고, 세대를 넘어 서로의 이야기에 부드럽게 섞여 든다. (과학에서 말하는 시간 구분의 무의미를, 시간을 확실하게 구분하여 전개되는 이야기 속에서 느낀다) 100년의 세월이 겹친다. 시대가 겹치면서 공존한 네 명의 여성은 서로의 조력자인 친구(남편이나 부모님이 아닌 각 여성의 여자 친구들이다)와 함께 각 시대의 어려움과 그로 인한 개인의 고통을 견딘다. 한 세대를 넘어, 증조할머니와 많이 닮았다는 화자인 지연은 긴 이야기 속에서 현재 자신의 엄마와 할머니의 관계를 이해하고, 자신 역시 엄마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며 위로받는다. 기억 속의 과거와 아직 오지 않을 미래를 위해 살지 말고, 현재, 지금을 살아야 함을, 이 긴 이야기에서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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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여성, 스크린을 넘어 스토리가 되다』
허은, 이은숙, 정영희 지음 ∣ 조윤커뮤니케이션 ∣ 2023년 ∣ 240쪽
한반도 도래인들이 일본 문화에 준 영향의 흔적을 찾아 일본 문화를 접하게 한 답사기, 증조할머니의 삶을 할머니로에게서 들으며, 자신의 문제를 풀어가는 과정을 보인 소설, 그리고 대중문화 속 달라진 여성들의 지위, 태도, 성향 등을 다루고 있는 이 책을 묶어 긴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서평을 쓴 것은 내가 감지하는 시간을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보고 싶어서다. 현재의 시간만 인정하고 기억 속의 과거와 다가올 미래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과학자의 말에 충격을 받았었다. 타임슬립이며, 동시간대의 다른 공간으로 이동 등 설명이 불가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답사기와 소설을 읽으면서 막연하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너무 주관적인 느낌일까? 이 책은 미디어 연구자, 드라마 연구자, 여성지 편집장 3명의 여성 필자가 공동으로 드라마, 영화, 예능, 팟캐스트, 웹툰 등에서 달라진 여성의 모습을 살펴본 대중문화 비평서다. 다루고 있는 시간대는 작가들이 인식할 수 있는 50년(작가들의 나이를 짐작해서) 정도로, 그 시간에서 대중문화 속 달라진 여성의 변화를 언급했다. 불과 몇십 년 전 대중매체에서 여성은 보조자 역할이거나, 주인공이라 하더라도 남성의 짝으로, 응시의 대상, 보이는 역할이 주였다. 그러던 여성들이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작품에서는 중심이 되어 작품을 끌고 가고, 당당하고, 주체적인 모습이다. 능동적으로 스토리를 이끌어가는 여성들이 전혀 억지스럽거나 낯설지 않다. ‘미디어가 담아내는 여성의 모습을 여성주의 시각에서 살펴보고, 달라진 여성 서사와 캐릭터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2023년 현재가 중심이다. 대부분 재미있게 시청한 드라마와 예능, 그리고 웹툰 등 25편이 소개된다. 봤거나 볼 예정이라 글을 읽는 것이 매우 흥미롭다. 고대사를 다룬 답사기, 증조할머니, 할머니, 엄마, 그리고 화자로 이어지는 100년도 넘는 세월 속 삶을 다룬 소설, 그리고 현재 시각에서 대중매체가 보여주는 달라진 여성의 모습은 삶에 시간의 개념이 얼마나 주관적으로 인식되는지를 생각하게 했다. 시간을 구분하지 않거나 과거와 미래를 덜 생각한다면 현재의 나에게 더 집중하지 않을까 다소 엉뚱한 생각도 한다. 각자의 책이 갖는 의미와 함께 세 작품에서 느껴지는 시간을 언급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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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애라
숭곡중학교 국어교사. 전국학교도서관모임 전 대표. 서울학교도서관모임 회원.책을 통해 성장한 저는 책과 함께한 시간들이 소중해서, 평등하고 온기가 넘치는 학교도서관을 꿈꾸었습니다. 성찰이 있어 평안한 60+의 인생을 향해 오늘도 책을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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