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2007-11-16] [책읽기 365] ‘책읽는 청주’ 독서로 소통하는 행복도시 지금 관점으로 보면, 연암은 이 가을 팔짱끼고 한 번 거리를 걸으며 이야기를 하고픈 남자인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 같이 살면 매우 피곤했을 것 같은데, 선생님 보시기에는, 연암의 가족들은 행복했을 것 같나요?” 지난 8일 오전 청주 시립정보도서관 강당에서는 연신 한바탕 웃음이 터져나왔다. 제3회 ‘책읽는청주’ 선정도서인 ‘삶과 문명의 눈부신 비전, 열하일기’의 저자 고미숙씨의 강연회가 열린 이곳에서는 저자의 재기넘치는 입담과 더불어 시민들의 생생한 질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학생에서부터 대학생, 일반인들까지 250여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강연회가 끝나고 이어진 사인회에서도 저자와 눈을 맞추려는 시민들이 길게 줄을 섰다. 언론이 나서서 책읽기 운동을 펼치고 각 단체와 도서관들이 양서목록을 발표하는 나라. 그럼에도 성인 연평균 독서량 12권, 성인 4명 중 1명은 아예 책 한 권 읽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에 비춰볼 때 이 같은 청주의 책 읽기 바람은 이상(異常)하다. 지난해 가을부터 ‘책읽는청주’라는 이름으로 펼치고 있는 ‘한 도시 한 책 읽기(one book one city)’ 사업은 다른 시·도의 부러움을 살 정도로 활발하다. 그 힘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독서운동 때문에 획기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조금씩 번져나가고 있습니다. 도서관을 기반으로 한 주부독서클럽 회원뿐 아니라 중·고생과 대학생의 참여율도 높아요. 시민토론회에 가보면 그 열기가 느껴집니다. 독서운동은 TV 등을 동원해 요란하게 하기보다는 다만 책 읽기가 즐거운 행위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하는 것이 중요한 듯합니다.” ‘책읽는청주’ 추진위원인 윤정옥 청주대 교수의 말이다. 청주대와 충북대 교수 등을 중심으로 ‘책읽는청주 추진위원회’가 꾸려진 것은 지난해 2월. 이후 시와 교육청, 청주방송(CJB)의 협조를 얻어 탄력을 받으면서 청주의 한 책 읽기 사업은 본궤도에 진입했다. 추진위는 6개월 가까이 책읽기 세부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청주시립정보도서관 측에서 실무를 맡아 지난해 9월 초 첫번째 ‘책읽는청주’ 선정도서를 발표됐다. ‘한 책 읽기’ 사업은 본질적으로 독서 토론의 활성화를 통한 독서의 확장에 목적을 두고 있다. 때문에 이 사업의 성패는 도서 선정과 담당자들의 기획력에 좌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읽는청주’의 가장 큰 특징은 책읽기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진행한다는 점이다. 또 ‘한 책 읽기’를 진행하는 타 시·도가 1년에 한 권의 책을 선정하는 데 반해 청주에서는 1년에 2회 책을 선정한다. 지자체의 적극적인 후원도 한몫을 차지한다. 청주시는 한 해 약 7000만원의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이는 타시에 비해 2~3배 많은 액수다. ‘책읽는청주’는 책 선정 과정에서 시민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하고 이들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아기자기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4개월의 ‘한 책 읽기’ 사업 기간 가운데 두 달은 집중적으로 책을 읽는 기간이다. 이 기간 중 시민들은 청주 시내 3곳의 공공도서관과 ‘한 책 읽기’에 동참하는 시내 북카페에서 책을 접하게 된다. 책을 함께 돌려 읽는 독서클럽도 모집한다. 첫번째 도서로 선정된 ‘압록강은 흐른다’(이미륵)와 두번째 책 ‘나의 아름다운 정원’(심윤경)의 경우 각각 1000여 명의 시민들이 독서클럽 활동에 참여했다.
책읽기가 끝나면 내용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저자 강연회와 전시회 혹은 영상물 상영회 등이 열린다. 마무리 행사인 토론회는 ‘한 책 읽기’의 핵심 활동으로 같은 책을 읽고 느낀 서로 다른 생각을 나누는 자리다. 북클럽 교차토론회와 시민 및 청소년 등 각기 대상을 달리한 토론회가 도서당 평균 4회 열렸고, 모임마다 150여명이 참여했다. 지역방송의 ‘책읽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빼놓을 수 없다. 선정도서 원문 낭독과 독서 퀴즈로 구성되는 방송은 ‘책읽는청주’를 알리는 최대 공로자다. 도서선정 과정에서도 라디오를 시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매체로 적극 활용한다. 선정도서를 발표하기 전, 도서선정위원들이 3권의 후보도서를 압축해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베틀북스’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문자 메시지나 인터넷 혹은 도서관에 설치된 스티커판을 통해 투표를 한다. ‘책읽는청주’는 모든 시민이 함께 읽을 수 있는 책, 토론이 가능한 책을 기준으로 도서를 선정하지만 베스트셀러를 고집하지는 않는다. 눈에 띄는 점은 다른 시·도들이 어린이책을 위주로 선정하는 것과 달리 청소년 이상 성인을 대상으로 책을 고른다는 점이다. 추진위원인 임승빈 청주대 교수(국문과)는 “모든 시민이 함께 읽는 책을 고른다 할 때, 어린이책을 선정할 경우에는 어른이 소외가 된다”며 “가급적이면 어른에서 중학생 수준까지 읽을 수 있는 책으로 정한다”고 말했다. “그간 읽었던 두 권의 책을 이해하는 폭은 각각 어른과 청소년이 다르겠지만 나름대로 이해는 할 수 있거든요. 지난번에는 두 번 다 성장소설을 택했는데, 이번에는 인문교양서라서 조금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앞으로는 시민들의 흥미를 좀더 넓힐 수 있는 쪽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다면 청주 시민은 한 책 읽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이날 강연회에 참석한 주부 김경복씨(47)는 “‘책읽는청주’를 통해 추천된 책을 읽고 토론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제 삶을 좀더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됐다”고 했다. “그동안 ‘나의 아름다운 정원’을 읽고는 고부관계에 대해서 생각해봤고 ‘삶과 문명의 아름다운 비전, 열하일기’를 읽고는 공부법이라든가, 남편과의 관계 등에 대해서도 생각해봤지요. 무엇보다 책 한 권을 읽고 여러 사람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 다른 생각들을 그냥 흘려 넘기지 않고 듣는 것이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독서만이 우리의 본분’이라고 했다. 독서를 통한 소통은 그 어떤 대화보다도 인간의 삶을 충만하게 한다. 청주의 조용한 책 읽기 바람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청주|글 윤민용·사진 이상훈 기자 sungman@hani.co.kr 윤정옥교수 “혼자읽기서 토론하기로” “청주의 경우는 책 읽는 행위의 즐거움을 알리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이런 맞춤운동을 하기에는 50만~60만명 정도의 규모를 가진 도시가 알맞은 것 같아요. 너무 크게 확장할 필요도 없고요.” 사실 한 책 읽기 운동을 펼치는 데 어려움도 많았다. 일부에서는 ‘왜 한 책을 강요하느냐. 이건 폭력이 아니냐’라는 소리도 해댔다. 시의 재정지원을 받다 보니 그때그때 융통성 있게 예산을 집행할 수 없는 것도 어려움이다. 그럼에도 윤교수가 한 책 읽기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즐거운 책읽기’로 가는 징검다리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윤교수가 서일민 청주 기적의 도서관장과 함께 책읽기와 토론의 길잡이가 되는 워크북을 만드는 것도 이 때문이다. “ 토론지는 토론을 위한 실마리일 뿐입니다. 일단 말문이 터지면 봇물 터지듯 토론이 활발해져요. 한 가지 주제에서 시작해 여러 주제에 대한 대화가 오가죠. 혼자서만 읽고 멈추는 독서가 아니라 나누고 소통하는 독서, 그래서 다시 다른 책읽기로 돌아가자는 것이 한 책 읽기 운동의 핵심입니다.” 윤교수는 현재 다른 지방자치단체의 ‘한 책 읽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2003 년 시범사업으로 도입한 서산과 순천의 경우, 성공이냐 실패냐를 쉽사리 평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건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죠. 지역마다 주체가 다르고 한 책 읽기 운동의 방향도 조금씩 다르다보니 비교가 쉽지는 않아요. 또 본질적으로 우리나라의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은 미국의 그것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미국의 경우는 인구 3만~4만명당 공공도서관이 1곳일 정도로 공공도서관이 보급돼 있어요. 공공도서관이 지역사회의 문화중심 역할과 독서운동의 기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거죠. 그에 비해 우리 공공도서관은 역할이 미국과는 다릅니다. 도서 기부나 자원봉사자들도 많지 않아 실무자들은 업무 과부하로 고생을 하고 있고 대부분이 시에서 재정지원을 받다보니 자유 재량을 발휘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 아쉽습니다.” 실무자 무지·官주도 ‘진도’ 못나간다…‘한 책 읽기’헛바퀴 ‘한 도시 한 책 읽기’가 우리나라에 도입된 지 5년. 현재 이를 실시하고 있는 곳은 서산, 순천 등 7개 도시다. 이밖에 서울은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으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를, 경상북도는 도차원에서 지난 8월부터 1년에 20권의 책을 읽자는 BS120(book start120)과 더불어 ‘한 도시 한 책 읽기’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에서 실시하는 ‘한 도시 한 책 읽기’는 도입단계에서 크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는 시민에 대한 홍보부족도 있지만 무엇보다 실무진의 한 책 읽기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 책 읽기’의 성패는 ‘한 책 읽기’운동에 대한 담당자들의 충실한 이해와 이에 바탕한 다양한 세부프로그램의 운영에 있다. 실무진의 기획력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잦은 담당교체로 업무의 지속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경우가 왕왕 있고, ‘한 책 읽기’가 기존의 독서운동과 갖는 차별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담당자들도 많다. ‘한 도서관 한 책 읽기’를 펼치고 있는 서울문화재단이 사업에 앞서 사서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도서관이 아닌 행정기관이 실무를 담당하면서 ‘한 책 읽기’의 방향성이 훼손되는 것도 문제다. 7개 도시의 주관기관을 조사한 결과 도서관과 지방자치단체로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순천, 김해 등처럼 지자체가 담당할 경우는 독서운동 자체보다는 작은 도서관만들기, 도서관 신축 등 외형적인 인프라 구축에 좀더 주력하는 양상이다. 인프라 구축도 필요한 일이지만, ‘한 책 읽기’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진 실무진이 필요하다. 선정도서가 특정 연령층에 국한돼 있는 것도 문제다. 그간 김해를 제외한 6개 도시에서 선정된 도서 24권 중 절반이 어린이책 혹은 청소년대상 베스트셀러다. 이 때문에 애초 성인에게 독서를 권장할 목적으로 기획된 ‘한 도시 한 책 읽기’ 운동의 취지가 약화되는 모양새다. ‘한 도서관 한 책 읽기’를 진행 중인 서울의 도서관들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형편이다. 대부분의 실무진이 “어느 한 계층이 소외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비교적 읽기 쉬운 어린이책을 도서로 선정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한 책 읽기’의 지원금(혹은 예산)을 타기 위해서는 성인에 비해 독서력과 참여율이 왕성한 어린이층·청소년층을 공략할 수밖에 없다는 것. 대부분의 시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독후감 공모와 토론회를 여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즉각적으로 성과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 독서운동일진대, 이를 수치화해서 평가하고 예산을 편성하다보니 벌어지는 일이다. 또 어린이책을 선정하다보면 자연스레 성인들은 ‘한 책 읽기’가 자신이 아닌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여기게 돼 소외되고 있다. 예산부족과 아직 활발하지 않은 기부문화 역시 ‘한 책 읽기’의 지속적인 진행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시·도별로 다르지만 ‘한 책 읽기’ 예산은 최소 800만원에서 2000만원 수준. 원주시처럼 전용예산이 없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한 책 읽기’의 핵심인 토론을 위한 안내서인 토론자료집 제작과 배부도 원활하지 못하다. 청주와 부산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에서는 예산부족으로 자료집 발간은 엄두도 못내고 있는 형편이었다. 대부분은 도서구입비와 프로그램 운영비, 홍보비로 예산을 사용하고 있었다. ‘한 도시 한 책 읽기’가 더욱 견고하게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갈 길이 멀다. 전문적인 전담인력들이 시민 눈높이에 맞춘 도서선정과 흥미를 유발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더불어 성숙한 시민들의 토론문화도 요청된다. 윤민용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