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2005-12-27]
[이순원 칼럼]책읽기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들 요즘 고교 3학년 학생들은 자신들이 받아본 수능 성적에 맞춰 이 눈치 저 눈치를 살피며 진학할 대학을 지원할 때이다. 사실 고3 학생들의 수능시험은 집안에 고등학생이 있든 없든 이미 국민적 관심사 가운데 하나가 돼버렸다.만약 집안에 그런 학생이 있다면 온 집안이 거기에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한 해나 두 해를 보낸다. 아니, 이것도 많이 양보해서 한 말이다. 한해 두해가 아니라 아이가 태어나 처음 글을 배우기 시작해 고3이 돼 수능시험을 보는 날까지 유소년기와 청소년기 전부가 그 시험을 통과해 나오는 데 바쳐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경쟁, 경쟁, 또 경쟁…. 온통 시험의 경쟁 속에 열아홉 살을 맞고 스무 살을 맞는 것이다. 그러다 입시가 끝나면 그때야 비로소 대학에 입학하는 이 아이들이 어떤 책을 읽는 것이 좋을까 하는 연례행사와도 같은 ‘독서 권유문’들이 다시 이런저런 지면을 장식한다.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책들도 어김없이 소개된다. 그런데 이때 추천되는 책들을 보면 그야말로 가관이다. 대체 그런 입시지옥 속에서 이 아이들이 중·고교 시절 어떤 책들을 읽었을까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이런저런 철학서와 사상서들이 그 목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책을 추천한 사람들은 한국의 대학생이면 ‘이 정도 수준의 책은 읽어야지’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래서 나름대로는 심혈을 기울여 이런저런 책들을 선정·권유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 땅에 입시 지옥이 없다면, 그래서 그 아이들 모두 중·고교 시절, 그들의 나이와 학력, 지식에 맞게 체계적으로 독서를 해왔다면 그런 전문가들의 추천 서적을 이제까지의 독서를 바탕으로 다음 단계의 지식을 접하듯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고, 또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순히 독음이 가능하다고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있다거나, 그 내용 또한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아니잖은가. 이 세상의 어떤 어려운 내용의 책도 그것을 읽고 이해하느냐, 못하느냐의 문제이지 그것이 한글로만 쓰여져 있다면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도 입으로는 얼마든지 읽는다. 고교 졸업 때까지 이런저런 시험에 치여, 또 성적만 중시하는 학교 공부에 치여 교과서 밖의 것으로는 국내외 단편소설 열 편도 채 읽지 않고 자란 아이들이 열에 아홉일 텐데, 어느 날 그 아이들이 대학생이 됐다고 해서 그런 추천 서적들을 읽을 수 있을지 나는 그와 관련된 캠페인이나 권유문을 볼 때마다 의문이 들곤 했다. 몇 년 전의 일이다. 어느 신문에선가 대학 신입생들이 읽을 만한 책을 추천해 달라고 해서 내 나름대로는 이런저런 정황을 종합해 그야말로 그 아이들이 중학생 시절에 읽어야 했음에도 분명 대다수는 읽지 않았을 독서 훈련의 입문과도 같은 책 열 권을 추천했더니, 대학생들이 읽기엔 너무 수준이 낮아서 제외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다음부터 다시는 그런 책 추천해본 일이 없지만, 어느 일도 전 단계와 다음 단계라는 게 있고, 훈련 과정이라는 게 있다. 나는 독서 역시 그렇지 않을까 생각한다. 머리만 커졌다고 어느 날 갑자기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독서에도 체계적 훈련이 필요하다. 얼마 전 어느 대학에 초청강연을 갔다가 직접 겪은 일이다. 문과대 학생 150명쯤이 앉은 자리였는데, 이 중에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어본 사람은 손을 들어보라고 하자 고작 두 명이 손을 들었다. 물론 읽었지만 손을 들지 않은 사람도 한둘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는 그들이 단지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는 이유만으로 습관적으로 헤겔과 칸트와 에리히 프롬을 권한다. 이제는 이런 독서의 형식주의도 사라질 때가 되지 않았을까. 문득 아이들의 입시철에 그 아이들이 앞으로 읽을 책과 관련해 지난 일들을 생각해 본다. 이순원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