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출판포럼 2004>
독서분과 주제 발표 내용
(사)출판유통진흥원이 주최하고 문화관광부가 후원하는 <한국출판포럼 2004>가 2004년 11월 18일부터 19일까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에서 열립니다. 독서분과와 출판분과, 유통분과로 나뉘어 진행되는 이번 포럼의 내용 가운데 독서분과 김상욱 교수(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책읽는사회 운영위원)의 주제 발표 내용 ‘한국 독서운동의 현황과 방향’을 싣습니다.
한국 독서운동의 현황과 방향
김상욱(춘천교대 국어교육과 교수, 책읽는사회 운영위원)
Ⅰ.디지털 시대의 책 읽기
디 지털 시대라고 한다.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디지털이라는 것이다. 곧 제한된 정보가 아니라 무제한의 정보를 손쉽게, 한꺼번에 전달하는 것이다. 우리는 멀티미디어, 음악과 영상, 문자와 소리가 동시에 전달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체의 변화는 단순히 수단의 변모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매체는 정보의 내용 자체를 변화시킨다. 흑백 텔레비전과 칼라 텔레비전의 변화가 단순히 색 보정의 효과만을 초래하지 않은 것처럼, 디지털 매체는 소통되는 정보의 질적, 양적 변화를 야기한다. 소통되는 정보의 양이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한하게 확대되었으며, 소통의 속도 또한 인터넷 매체의 영향으로 급속하게 빨라졌다. 시간의 돌진, 공간의 압축이라고 지칭되는 시대적 징후들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정보의 성격 또한 달라졌다. 이미지와 문자가 동시에 소통됨으로써, 문자 고유의 상상적 기능은 시각 매체를 통해 대체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과연 이 시대에도 책은 여전히 중요한가? 더욱이 아이들이게 책을 읽어야 한다고 강조할 어떠한 필연성이라도 있는 것인가? 사실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무조건 이를 탓할 수만도 없다. 이들이 살아야 하는 시대는 우리가 살았던 시대와 전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작해야 2, 30년 남짓밖에 지나지 않았으며, 인터넷이 실용화된 것도 10년 안팎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졌고, 이 아이들이 한 시대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되는 다음 세대는 얼마나 더 많은 것들이 달라질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들은 있다. 새로운 시대, 디지털 시대는 지식의 성격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명제적인 지식이나 사실에 관한 지식들을 굳이 암기할 필요가 없게 된다. 몇 번 컴퓨터의 자판을 두들기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김소월이 누구이며, 대표작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낱낱의 지식이 아니라, 대상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사고력이다. 그러나 디지털은 생각을 강요하지 않는다. 그저 감각을 열고 있으면 모든 것이 다 전달된다. 소리도 색깔도, 심지어는 냄새와 느낌까지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사고력을 은연 중에 배제하는 디지털매체는 따라서 인간을 더욱 인간적으로 만들기보다 정보의 소비자로 전락시킨다.
디지털 시대의 도래를 부정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현재의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 자본을 소유한 사람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혁명의 근저에는 단적으로 정보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주체들과 그 고속도로를 활용하기 위한 기본적인 하드웨어를 만들어 냄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이윤을 창출해내고자 하는 주체들의 욕망이 은폐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업 혁명과 디지털 혁명은 외적으로는 혁명의 구체적인 내용이 다를 수 있으나, 정작 그 내부로 한 발자국 진입해 보면 동일한 주체에 의한 사회적 재편이라는 의미에서 하나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그 변혁의 동기는 변혁의 주체인 자본의 자기 이윤을 영속적으로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삶의 내적 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오히려 부수적인 결과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자본이 상정하는 인간형이란 소비의 주체일 뿐이지, 자신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견지하면서 끊임없이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주체는 아닌 것이다.
사고력이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각하는 힘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잃지 않게 하는 동력이 된다. 사고력 가운데에서도 특히 필요한 것은 상상력이다. 일반적으로 상상력은 ‘지금, 여기’라는 제한된 시공간을 뛰어넘어 사고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상상력은 즉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대한 직접적인 반응이나 허무맹랑한 사고의 탈주와는 달리, 거듭 ‘지금, 여기’에서의 삶으로 다시금 되돌아오는 사고력이며, ‘지금, 여기’를 떠나 역설적으로 ‘지금, 여기’를 선명하게 밝혀 보이는 사고력이다. 우리는 이 상상력을 언어를 통해, 책을 통해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다. 마치 밥을 먹고 사람들이 사는 것처럼, 상상력은 살아가는 데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밥이 우리가 살아가도록 하는 데 비해, 상상력은 우리로 하여금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로 살아가게 만든다. 그러나 상상력은 그저 머리 속에서 촉발되지 않는다. 인간의 두뇌는 오히려 하이퍼텍스트와 흡사한 나머지 조직적이고, 구조화된 형태로 사유의 힘을 드러내지 않는다. 자칫 공상으로 치닫기 십상인 것이다. 따라서 상상력은 구체적인 사유의 대상을 필요로 하며, 이는 언어를 통해, 책을 통해 가장 잘 획득할 수 있다.
무엇보다 언어는, 책은 그 자체로 하나의 상상적 산물이다. 애초 기호가 그러하다. 무엇인가로 무엇을 대신하는 것이 기호라고 할 때, 목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소환하는 힘을 언어는 지니고 있다. 더욱이 이 언어의 조직적인 집합체인 책은 상상력의 최대치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책은 그 자체로 상상을 통해 지은 하나의 집이며, 우리는 그 집 속에서 우리 자신의 상상력을 유연하게 펼쳐나갈 토대를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책은 지나버린 시대의 기록물이 아니라, 인간의 현재적 삶을 가장 선명하게 밝혀보이는 인간을 위한 인간적인 매체이며, 가장 오래도록 인간을 인간 답게 만드는 매체인 것이다.
Ⅱ.문학 읽기의 중요성
일반적으로 책 읽기를 간접적 경험이라고 한다. 경험을 책으로 대신한다는 것이다. 물론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경험이다. 삶을 알기 위한 가장 분명한 방법은 사는 것 그 자체인 것이다. 삶 자체를 경험하는 것, 그것을 아놀드 하우저는 삶의 총체성, 곧 삶에 관한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는 분명한 한 경로라고 피력한 바 있다.
하우저는 인간은 오직 두 경로를 통해서만 삶의 진정한 본질을 인식할 수 있다1)고 말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일상적 삶 그 자체이다. 마치 물은 마셔본 사람만이 물맛을 아는 것처럼, 삶은 살아보는 것, 경험하는 것을 통해서야 비로소 파악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산다는 것만으로 삶에 관한 통찰을 저절로 얻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모든 노인들은 깨달은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삶을 통해 삶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반성적인 사고가 필수적이다.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서는 삶 자체가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삶 그 자체는 파편화된 경험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조각을 이어 붙여 하나의 완결된 의미를 일구어내는 노력만이 삶의 본질에 대한 통찰을 앞질러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 힘입지 않고서도 삶의 본질을 포착할 수 있는 또 다른 경로가 있다. 그것은 예술이다. 예술이야말로 삶의 전체적인 면모를 포괄하지 않고서도 시작과 끝이 있는 하나의 완결된 삶의 면모를 여실히 입증함으로써 삶이 무엇이며, 또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예감케 한다. 예술이야말로 그 모든 자질구레한 군더더기를 배제한 채, 하나의 주제 혹은 정서 안에서 집중적으로 대상을 제시한다. 문학 또한 이러한 예술의 본질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삶을 집약적으로 제시함으로써, 그 삶 속에서 공명하는 인간의 영혼이 무엇인지를 탐구해 보이는 것이다.
여기에서 작가는 자신의 견지에서 어기차게 탐구해 온 삶에 대한 통찰을 드러낸다. 물론 그 통찰은 범상한 일상인의 통찰과 다르다. 적어도 그는 탐구하고자 하는 대상을 그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탐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 탐구의 결실은 하나의 중심을 통해 일관되게 배치됨으로써, 밀도있는 부분을 바탕으로 전체의 진실로 육박해 감으로써 생의 내포적인 총체성을 획득한다. 더욱이 문학은 삶을 총체적으로 제시할 뿐만 아니라, 미처 인식하지 못하였던 부분을 섬세하게 비추어주는 ‘세부의 진실성’조차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데 다소 유연하게 생각해 본다면, 삶에 대한 총체적인 경험의 재구성은 시와 소설 등의 순문학적인 작품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애초 시와 소설은 서정이나 서사와 같은, 인간이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기본 장르의 역사적인 형태일 따름이다. 따라서 문학의 영역은 더 한층 폭넓게 설정되어야 한다. 전기와 자서전, 에세이와 수필, 비평과 이야기 등 모든 글쓰기의 형식들이 문학에 포함되며, 구체적으로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지 않는 모든 책들은 폭 넓은 의미의 문학이며, 상상력의 원천인 것이다.
그렇다면 책읽기는 단순한 간접적인 경험이 아니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독자는 인물들이 경험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경험함과 동시에 인물과 동일시되어 직접적으로 경험하기도 하는 것이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경험과 관찰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 읽기는 간접적인 경험임과 동시에 직접적인 경험이기도 하다. 특히 디지털 시대인 지금,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겪는 경험의 폭과 깊이는 예전에 비할 대 현저히 좁아지고, 얕아졌음은 명확하다. 더 이상 문학 작품의 읽기는 간접적이며 이차적인 경험이 아나라, 그 자체가 경험의 풍부한 원천인 것이다.
독서운동이 요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풍부하고 깊이 있는 삶의 경험을 제공하고, 그 경험으로부터 상상력을 길러주어야 하는 것은 적어도 양식 있는 사회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디지털 매체에서 한 걸음 비껴서서, 스스로와 타자를, 또 세상을 보는 눈과 더 한층 인간적인 삶의 희망을 지켜나가는 것은 자본에 맞서는 운동의 형태로 전개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Ⅲ.한국의 독서운동
어느 나라라고 다를 바가 없겠지만, 한국의 독서운동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넓게 보자면 전통적인 관리의 선발 방식이었던 과거제도도 일종의 독서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 정해진 고전적인 책들을 읽고, 그 책의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독서와 독서인에 관한 가치평가 역시 그 어떤 지역보다 우호적이었으며, 견고한 이데올로기로 굳어져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독서는 인문학 전반의 위기와 함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디지털 매체의 전방위적인 공세 앞에서 독서는 예전의 빛을 잃고 있다. 그럼에도 독서운동은 더욱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다. 위기를 절박하게 느끼는 만큼 그 필요성 또한 절실하기 때문이다. 마치 환경이 파괴되는 시점에 환경운동이 꿈틀대는 것처럼.
현재 진행되는 독서운동의 방향은 대체로 4가지 축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첫 번째는 정부 주도의 독서운동이다. 그 대표적인 형태를 우리는 70년대의 ‘자유교양경시대회’를 들 수 있다. 정해진 책을 읽고, 책의 내용을 문제 풀이 식으로 시험을 보는 방식이었다. 책들은 주로 고전이라고 지칭되는 것들이었으며, 시험은 전국을 무대로 하는 리그전으로 치르졌다. 그러나 이 운동은 경시대회 자체가 갖는 문제로 말미암아 독서를 오히려 멀리 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선택받은 소수의 학생들이 합숙을 마다않고, 몇 권의 책을 단순 암기하는 것으로 시종하였다. 마치 소수의 엘리트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체육의 현주소를 보는 듯 했다.
이와 같은 정부 주도의 독서운동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학생생활기록부에 독서 이력을 기재하여, 대학 입시에 반영하겠다는 발상도 커다란 맥락에서는 유사하다. 그 현실적인 적용이 어떻게 이루어질 지는 여전히 모색중이기는 하나 기본적인 전제는 다르지 않다. 책은 중요하다. 그러니 책을 읽혀야 한다. 자발적으로 읽지 않으니 강제를 동원해서라도 읽는 것이 독서운동의 차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제가 동원되는 한, 자발성은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독서는 즐거움이 아니라 짐이 되며, 상상력의 자리를 암기력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즐거움과 상상력 모두를 저버린 독서운동은 차선이 아니며, 독서도 아닌 것이다.
두 번째 유형은 정부 주도의 독서운동과 일정한 차별성을 지니며 이루어지는, 교실을 전제로 한 교사들의 독서운동이다. ‘국어교사모임’을 비롯하여, 학교교육과 독서운동을 연결시키고자 하는 시도들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현행의 교육과정 체계 속에서는 어려우며, 기능적이고 목표중심적인 현재의 교육체계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하지 않는다면,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 다만 ‘책으로따뜻한세상을만드는교사모임’ 등의 활동은 교과를 넘어 통합적인 독서교육을 기획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법 하다. 적어도 교육적인 성취와 무관하다는 점에서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들 모임의 독서운동은 학교를 무대로 한다는 점에서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대학입시라는 거대한 괴물과 어떻게 맞설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쟁점일 것이다. 지금 현재로서는 골리앗의 싸움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최근 일간지와 제휴하여 활동을 진행하고 있는 Book Crossing운동도 이들 모임의 아이디어로부터 비롯되었으며, 청소년을 위한 권장도서의 선정과 독서교육의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하는 한편, 교사들의 계속교육을 위해서도 헌신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세 번째 유형은 상업적인 기획으로 이루어지는 독서운동이다. 교육시장의 확대와 함께 촉발된 운동으로, 겉으로는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으나 상업적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독서지도사 양성을 주축으로 초등학생들의 독서지도를 독려하고 있는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나 ‘독서새물결교사모임’ 등의 독서운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독서교육이 사교육시장으로서는 최후로 남은 미개척지에 해당하기에 이와 같은 경향들은 더욱 기승을 떨칠 것이다. 더욱이 ‘한우리독서문화운동본부’의 활동은 세력이 커지자, 도서선정과 구입을 둘러싸고 적극적으로 출판사들을 압박하기에 이르른 실정이다. 그럼에도 이들 단체들이 양성하는 독서지도사들은 독자와 직접 마주치는 독서운동의 구체적인 첨병이라는 긍정적인 기능과 함께 독서운동의 상업화라는 이중의 칼날을 지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향후 이들의 가능성을 발전적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는 정책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당장은 어렵겠지만, 문화관광부나 교육부 등은 별도의 법인을 설립해서라도 공적인 영역의 독서지도를 담당할 독서지도사의 양성과 자격 부여에 제도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네 번째는 시민단체의 활동으로 이루어지는 독서운동이다. 대표적인 단체는 ‘어린이도서연구회’를 비롯하여,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본부’ 등의 활동이다. 특히 ‘어린이도서연구회’의 활동은 바람직한 독서운동의 전형이란 점에서 소중하다. 애초 ‘서울양서협동조합’이란 명칭으로 비롯되어 연구회의 형태로 출범하였으나, 1980년에 들어 ‘어린이도서연구회’로 재정립된 이 단체는 ‘우리 겨레 어린이들에게 우리 책을 읽힌다’는 당연한 자각을 바탕으로 자발적인 시민 운동을 시작하였다. 주로 초기에는 전집류 중심의 도서 시장을 단행본 중심으로 탈바꿈시키는 데 주목할 만한 역할을 하였으며, ‘추천도서’를 통해 어린이책의 질적 발전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작은 도서관 운동’과 ‘책 보내기 운동’ 등을 거쳐, 현재는 ‘책 읽어주기 운동’에 집중하고 있다. 현재 중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책 읽어주기’ 활동은 가정과 학교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독서운동임과 동시에 문학적 경험을 제공하는, 기초적이며 나아가 효과적인 활동이라는 점에서 장려할 만한 것이다. 더러 문자를 해독하지 못하는 단계에 국한된 활동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책 읽어주기’는 학령전부터 초등학교 전기간에 걸쳐 유용한 활동이다. 무엇보다 ‘어린이도서연구회’는 자발적인 시민단체가 가져야 하는 엄격한 도덕적 규율을 바탕으로 일체의 상업적인 의도들을 적극적으로 거부한다는 점에서, 또 그 구체화의 방안으로 회원들이 내는 회비를 바탕으로 해서 운영된다는 점에서 앞의 상업적인 독서운동과 엄격하게 구분된다. 그리고 ‘어린이도서연구회’의 가장 긍정적인 점들은 ‘동화읽는어른’이라는 이른바 전국적인 지역에 걸친 조직을 통해 자발적인 활동가들을 거듭 재생산, 충원해 낸다는 점이다. 이는 단속적이기 쉬운 독서운동의 활성화를 위한 풍부한 인적 자원들을 제공해 주고 있다. 다만 향후의 발전을 위해서는 전문성을 강화하는 방향과 대중성을 확대하는 방향을 모두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점에서 주체들의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어린이도서연구회’와 함께 9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하여 조직된 ‘책읽는사회만들기국민운동본부’ 또한 인상적인 시민운동단체이다. 이 단체는 지난해부터 방송사와 함께 자발적인 시민들의 성금에 기초하여 전국에 걸쳐 ‘기적의 도서관 건립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7개의 도서관이 완공, 운영되고 있으며, 나머지 8개의 도서관이 지속적으로 건립될 예정이다. 이처럼 지방자치단체와 시민들이 함께 결합하여 도서관을 건립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전무하다. 더욱이 이들 도서관들이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중심으로, 문화적 평등권을 추구해 나간다는 점에서 기존의 공공도서관과 명확하게 차별화된 도서관이다. 건립의 형태와 지향뿐만 아니라, 기적이 도서관이 갖는 독서운동으로서의 특성은 컨텐츠라고 지칭되는 도서 자료가 엄격한 선정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수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공공도서관이 책의 수서를 무작위의 선정과 입찰을 통해 충당하는 것과 명확히 구분된다. 더욱이 기적의 도서관은 도서관의 운영프로그램을 상시적으로 진행함으로써, 도서관의 본래 기능을 진작시킨다는 점에서도 의미있는 활동으로 평가된다.
기적의 도서관 건립과 함께 이 단체는 최근 Book Start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이 또한 소외지역의 영유아를 주된 대상으로 책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제공되는 프로그램이다. 이는 영국과 일본 등에서 이미 일정한 성과들을 거두고 있으며, 미국의 Head Start와 함께 영유아를 위한 주요한 독서운동으로 정착하게 될 것이다.
이들 시민단체의 활동들 가운데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17개 시민사회단체의 연대로 독서운동의 방향 전체를 기획하고 모색하고자 하는 ‘바람직한독서문화를위한시민연대’의 활동도 주목된다. 애초 상업적인 독서운동을 비판하는 데에서 시작된, 이 ‘시민연대’는 독서문화 전반의 새로운 대안들을 계발하는 한편,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 등으로 명확하게 연령별로 대상이 구분된 독서운동의 한계를 넘어 생애의 독자를 양성하기 위한 포괄적인 독서운동을 모색하고 있다.
Ⅳ.한국독서운동의 방향
지금 한국의 독서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한국 사회의 문화적 성숙에 기인한다. 1970년대와 80년대에 걸쳐 축적되어왔던 민주주의적 지향이 사회구성원들의 인식을 성숙시켰으며, 이 구성원들이 중추가 되어 다음 세대에게 비판적 지성을 위한 독서의 필요성을 거듭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경제적인 자본의 축적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현실의 여건은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상업적 기획들이 끊임없이 자발적인 독서를 방해하고 있다. 상업주의가 피할 수 없는 양상이라면, 적어도 독서운동의 주도권이 상업주의에 넘어가지 않도록 감시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광범위한 시민적 참여 속에서 그릇된 독서운동들을 억지하고, 새로운 대안들을 거듭 창출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독서운동은 단순히 학습의 보조적인 장치로 독서를 자리매김하는 데에서 벗어나 자발적인 생애의 독자를 형성하는 것이 목표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모든 세대와 연령을 포괄할 수 있는 더 한층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독서운동을 전개해야 할 것이다.
또 독서운동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독서의 인프라에 해당하는 구조들을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출판과 출판유통이 독서 인프라의 가장 중요한 부분임은 물론이다. 출판을 단순히 산업적인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관점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양질의 책들이 끊임없이 공급되지 못한다면, 독서운동은 현재의 문화적 실천과는 동떨어지게 될 것이다. 특히 미디어산업 전체와 맞물려 대자본 속에 통합된 미국과 같은 출판사의 존재 방식은 지극히 반문화적이다. 그런 점에서 아직도 중소자본이 운영의 주체가 되고 있는 한국의 출판 자본은 문화적 의미를 견지할 수 있는 가능성이 그나마 풍부한 편이다. 이들 소규모의 출판사들이 바람직한 출판문화를 형성하는 역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함께 유통의 현대화도 언제나 출판계의 발목을 잡는 문제임은 분명하다. 모르기는 하지만 IMF 때와 최근에 일어난 일련의 사태는 유통의 현대화가 얼마나 절실한지를 새삼 실감케 한다. 유통이 불안정하면, 결국 피해는 소규모의 출판사들에게 가중한 부담으로 전가되게 된다. 결국 출판은 상업주의에 전면으로 노출되는 판에 박힌 경로를 걷게 될 것이다. 그러나 생명 종이 다양해야 하는 것처럼, 내용과 형식에 있어 출판의 종도 다양해야만 한다. 그것이 문화적 응전력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출판 종의 다양성을 위해서도 유통의 현대화와 합리화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출판사 자체의 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수요가 명확한 책들만을 생산하는 데에서 벗어나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 실험과 창조적인 노력도 필요하다. 예컨대 청소년용 출판도 그 한 양상일 것이다. 입시에 빼앗긴 독자들을 다시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청소년들이 읽을 수 있는 양질의 책을 만드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출구인 것이다.
출판의 안정적인 강화와 함께 또 다른 인프라로 도서관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전국에 걸쳐 존재하는 국공립도서관을 단순히 수험생들이 공부를 하는 독서실의 기능을 과감히 탈피하고, 책의 모든 것들을 건사하고 실행하는 공간으로 새롭게 탈바꿈시켜야 한다. 공공도서관의 내실을 다지는 한편, 특수한 목적을 지닌 ‘전문도서관’과 ‘작은도서관’, ‘학교도서관’ 등을 통해 언제 어디에서라도 마음만 먹으면 책을 접할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야 한다. 도서관의 내실화와 확충은 정보의 왜곡된 축적이 만연하게 되는 현재의 시점에서 더 한층 그 중요성이 인식되어야 한다. 문화자본이 부족한 계층에게도 책이 전달되어 가능한 한 문화자본들을 사회 구성원들이 고루 갖춘 사회를 만드는데 일조해야 하는 것이다.
정부의 정책도 그 중요성에 걸맞게 더 한층 섬세하게 접근해 들어가야 할 것이다. 단순히 독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그 구체적인 실천을 어떻게 실행할 것인지 엄밀하게 가능성과 한계들을 따져 들어가야 할 것이다.
끝으로 독서문화의 진작이 새로운 공공영역으로 존재함을 승인하고, 더 많은 전문적인 노력과 관심이 경주되어야 한다. 추천도서를 비롯한 전문적인 선정 주체들이 공적으로 구성되어야 하며, 매체들 또한 더 많이 확충되어야 한다. 특정 출판사들의 입김으로부터 자유로운 선정위원회가 구성되고, 그를 통해 쏟아져나오는 수많은 책들의 효용과 가치들이 엄격하게 평가되어야 한다.
Ⅴ.책 읽는 사회를 위하여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영화 중에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란 영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론을 설명하기 위해 적지 않게 인용되곤 하는 영화이다. 비록 공상과학영화의 외장을 빌리고 있지만, 이 영화 속에는 서기 2019년의 미래 사회가 그려져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더 이상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다. 인간들은 오로지 자신들에게 맡겨진 기능적인 일들을 일말의 회의 없이 수행해 나갈 따름이다. 그런데 오히려 Replicant라고 지칭되는 복제인간들이 거꾸로 자신의 역사와 정체성을 찾아나선다. 섬뜩한 미래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독서는 그 섬뜩한 미래를 가까운 미래가 아닌 먼 미래로 밀쳐 놓는 힘을 지니고 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사유한다는 것이며, 사유한다는 것은 상상력을 작동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곧 ‘지금 여기’를 벗어나 과거를, 또 미래를, 나아가 과거와 미래를 통해 거꾸로 현재를 투영해 보는 인간적인 활동이 독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 능력들을 디지털 매체에게 저당 잡힐 위기에 처해 있다.
독서가 취미가 아닌 생활이어야 한다는 말은 언제나 지당하다. 생애의 독자들에게 독서는 생애를 이어가는 한 가닥 질긴 끈으로 일찍부터 오래도록 이어져야 한다. 이 궁극적인 목적을 위해 독서운동은 지속되어야 하며, 더 한층 강화되어야 한다. 생애의 독자들이 많아지는 그만큼 책은 풍성해질 것이며, 우리 사회 역시 더 한층 바람직해 질 것이다. 따라서 책을 생계의 수단으로 삼고 있는 모든 이들 - 작가, 출판인, 연구자, 교사 등- 은 견고하게 연대하여, 생애의 독자들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책은 예술이며, 정치이며, 문화이며, 생활이며, 경제이며, 그밖의 모든 것이기도 하며, 숭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