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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3-07
    [2011-02-25] 탁월성과 행복

  • 헤로도토스가 쓴 <역사>의 한 대목에 이런 것이 있다. 한번은 페르시아 왕 아무개가 군대를 몰아 원정길에 나선다. 그리스를 치기 위해서다. 접경지역에 다다랐을 때 그는 그리스인들이 그 시간에 무얼 하고 있는지가 궁금해진다. 그는 사람을 풀어 아테네를 정탐하게 하는데, 그 대목을 지금 이 칼럼의 목적에 맞게 풀어쓰면 이러하다. “그래, 그 자들은 지금 무얼 하고 있더냐?” “올림픽이라는 걸 하고 있습니다.” “올림픽이 뭔데?” “운동경기입니다.” “운동경기라? 경기에 이기면 무엇을 주더냐?” “월계수 나무 잎사귀로 만든 관을 머리에 씌워줍니다.” 왕은 피식 웃고 좌우를 돌아보며 만강의 경멸이 담긴 목소리로 선언한다. “미친놈들, 돈도 아니고 황금관도 아닌 고작 나무 잎사귀 관을 준다고?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나 하는 자들이 감히 우리 상대가 될 수 있겠나? 당장 치자!” 그러자 막료 한 사람이 나서서 충고한다. “폐하, 저들은 돈을 바라고 경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무얼 바라는데?” “저들은 각자가 가진 탁월성을 보여주기 위해 경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돈을 바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탁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죽자 사자 뛰고 달리는 자들의 나라라면, 그런 나라는 절대로 치기가 쉽지 않습니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물론 왕은 참모의 그 간언을 잠깐이나마 새겨들을 ‘귀’를 갖고 있지 않다.


    그 ‘귀’가 없었던 왕의 그리스 정벌 시도가 어떻게 결판났는지, 그게 궁금한 사람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책을 읽어보면 된다. 지금 우리의 관심사는 ‘탁월성’이라는 문제, 그리고 ‘귀의 결여’ 또는 ‘귀의 부재’라는 문제다. 탁월성(excellence)이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도 개인, 사회, 국가를 휘어잡고 있는 핵심어 중의 핵심어다. 탁월성이라는 것은 경쟁과 자유의 관념과 마찬가지로 현대 서구 문명이 고대 그리스 문명의 유산목록에서 찾아내 온 세계로 확산시킨 어휘이고 개념이다. 그리스적 문맥에서 보면 그 세 가지는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탁월성은 경쟁을 통해서 가장 잘 드러나고 발휘된다. 그런데 그 경쟁은 자유인들 사이의 자유로운 경쟁이어야 한다. 탁월성을 발휘하는 데는 자유라는 조건이 필요하다. 탁월성을 가려내려는 경쟁이 자유의 조건에서 진행되지 않는다면 탁월성의 발휘는 가능하지 않다. 노예는 제 아무리 탁월해도 자기 탁월성을 드러낼 수 없다. 경쟁을 통해 탁월성을 발휘할 자유가 없기 때문이다.


    신과 인간의 경쟁에서도 그러하다. 인간은 신보다는 열등하기 때문에 신과 인간 사이의 경쟁은 평등하지 않은 관계에서 진행되는 경쟁이다. 그것은 제 아무리 잘난 인간도 반드시 져야 하고 반드시 지게 되어 있는 불평등 경쟁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그 신들에게 도전해서 한판 붙고 ‘맞짱’ 뜨려는 탁월한 인간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반드시’ 지게 되어 있다. 악사 마르시아스는 아폴론을 상대로 피리 연주 경쟁에 나섰다가 패퇴해서 껍질이 벗겨지고, 직녀 아라크네는 아테나 여신을 상대로 베짜기 시합을 벌이다가 져서 거미가 된다. 이 인간들은 탁월성이 신들만 못해서 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신을 놀라게 하고 벌벌 떨게 하는 탁월성의 소유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마치 자유인과 노예의 관계에서처럼 세계 질서상 신들보다는 한 단계 낮은 지위의 ‘인간’이기 때문에 제 아무리 높은 수준의 탁월성을 발휘한다 해도,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경쟁에서 신들을 이긴다 해도 판정은 언제나 ‘졌다’로 나온다. 그래서 그리스적 인문학의 ‘자유’ 개념 속에는 신과 인간 사이의 이런 불평등에 대한 불만과 항의가 깔려 있다.


    내 칼럼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얘기가 걸핏하면 옆길로 빠진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무슨 얘기를 하기 위해 또 옆길로 빠지고 있는가. 첫째, ‘탁월성’이라는 것은 탁월한 개념이다. 사람들은 모두 저 나름의 탁월성을 가지고 있다. 그 탁월성은 우선 자기 직업과 일에 대한 성실성으로서의 탁월성이다. 내가 사는 동네의 ‘만물보수점’ 주인은 아파트의 막힌 수채 구멍, 얼어터진 수도관, 깨진 유리창을 보수해주는 일에 그렇게 성실할 수가 없다. 그는 자신의 직업적 기술을 발휘하는 데 탁월하고 성실하다. 우리 옆 동네 컴퓨터 수리점 주인은 인터넷 무선 연결장치를 손봐주러 우리 집에 왔다가 3시간 작업을 하고서도 일이 원만히 해결되지 않자 출장비를 받지 않겠다고 우긴 사람이다. “고치지도 못했는데 돈은 무슨 돈입니까?” 그는 평생 가난하게 살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그는 탁월하다. 그가 보여준 것은 신뢰 획득의 탁월성이다. 고객이 그를 믿을 수 있게 하고 다시 일을 맡기게 하는 탁월성, 엷은 계산을 넘어선 탁월성이 그것이다. 그는 기능적 기술적 탁월성 이상의 것, 신뢰와 애정과 존경을 불러일으키는 인간적 탁월성의 부자다.


    내가 말하고 싶은 두 번째 사항은 ‘귀’의 탁월성이다. 눈은 무엇이건 볼 수 있는 것은 다 보라고 우리 몸에 붙어 있다. 귀도 그러하다. 무언이건 들을 수 있는 것, 들리는 것은 다 들으라고 붙어 있는 것이 귀다. 그러나 그 눈과 귀에는 조물주의 중요한 단서가 하나 붙어 있다.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 하고 귀에 들리는 대로 다 받아들여 우줄우줄 따라가지는 말라는 경고 단서가 그것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 중에서 무엇이 탁월한 것인지를 판별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그것이 조물주가 약속한 행복의 비결이다. 눈에 보이는 대로 따라가고 귀에 들리는 대로 따라 하기, 이 따라가고 따라 하기에만 열중할 때 영혼은 병든다. 병든 영혼은 찜질방에 가서도 슬프고, 슬픈 영혼은 돈더미에 앉아서도 행복하지 않다. 귀는 언제 탁월해지는가? 눈은 어떻게 탁월해지는가? 다음 칼럼의 화두다.


    <경희대 명예교수>

    ~국민일보 [도정일의 人 + 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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