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12
  • 2010-08-13
    [공부론] 앎을 비운 자리서 숙성되는 지혜

  • 경향신문은 '책 읽는 경향'을 통해 매일 아침 독자들에게 책 한 권씩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올해로 4년째 쉬지 않고 내보내고 있습니다. 일간지 1면에 날마다 서평 형태의 칼럼을 싣는다는 것은 신문사로선 매우 이례적인 기획일 뿐더러 사회적으로도 무척 의미 있는 일입니다. 7월과 8월 두 달 동안 '책읽는사회'가 '책 읽는 경향'을 맡아 책 소갯글을 주선하기로 하였습니다.



    공부론 | 김영민 · 샘터


    앎을 비운 자리서 숙성되는 지혜
    ~김수우 | 시인, 인문학 카페 ‘백년어서원’ 대표~
    범박하게 풀어 보자면,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네 속담도 이 같은 이치의 일단을 담고 있다. 지성이 의식적 모색이라면 감천은 무의식적 응답인 셈이고 그 사이, 곧 지성의 모색을 다한 이후에 그 노력 자체를 모른 체하는 휴식과 숙성의 시기를 영감의 배태기로 볼 수 있겠기 때문이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격언에 ‘달빛과 더불어 옥수수도 익는다’는 게 있다. 벼나 해바라기와 마찬가지로 태양빛으로 옥수수가 익는다는 것이 우리네의 상식일진대, ‘달빛 아래 익는 옥수수’를 떠올리는 인디언들의 상상 속에는 대체 무슨 이치가 숨어 있을까? 옥수수의 맛은 햇빛의 맛이 전부일까. 혹은 우리의 잠결 속에 스미는 그 달빛의 맛을 감추고 있을까? ‘김치는 손맛’이라고들 하고, 평생 김치를 애용하는 우리 모두는 단박 그 말의 뜻을 알아챈다. 그러나 정작 김치의 맛은 바로 그 손이 김치를 잊고 있는 동안에 숙성한다. 다시 말하면, 김치를 담근 그 손길들이 자신의 노고를 알면서 모른 체하는 사이, 김치는 그 누구도 모르는 익명의 무의식(=김치 항아리) 속에서 익어가는 것이다. (52~53쪽)


    시간은 가장 오래된 지혜이며 새로운 지혜이다. 쉼과 기다림은 실제로 삶과 꿈을 감응시키는 숨은 질서, 자연의 질서가 아닐까. 모두 현실에 매달려 있지만 정작 삶은 보이지 않는 데서 완성되고 있는지 모른다. 함부로 조급하고 함부로 판단하는 시대, ‘진인사대천명’은 우리가 익혀야 할 무위의 자세이리라. 조급한 앎을 극복하고 스스로 비운 사이, 몰래 숙성되면서 결국 진리의 향기를 끌어내는 힘, 이것이 바로 공부이며 공부의 까닭이므로. 무한한 우주에 닿아 있는 이 직관을 통해 우리의 영혼은 진보한다. 실존의 새로운 가능성을 끊임없이 제시하는 저자의 고유한 인문(人紋)이 올올이 느껴지는 페이지들. 섬세하고도 단호한 의지와 올곧은 실천, 그리고 모험이 층층이 드러난 결이 아름답다. 어디선가 옥수수 익은 냄새가 나는 듯.


    김수우 | 시인, 인문학 카페 ‘백년어서원’ 대표

목록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