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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청소년서점 부산 ‘인디고 서원’

  • [경향신문 2005-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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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3. 청소년서점 부산 ‘인디고 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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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디고서원의 독서토론회 ‘주제와 변주’에는 7월에 강수돌 고려대 교수가 찾아오는 등 앞으로 계속되며 내년초쯤 초청자들의 강연내용이 궁리 출판사에서 같은 제목의 책으로 묶여나올 예정이다. 지난 5일 한홍구 교수(오른쪽 네번째) 초청 토론회가 끝난뒤 서점에 모인 허아람 교사(오른쪽에서 세번째)와 인디고 아이들.

    부산 수영구 남천동 주택가의 ‘인디고서원’은 작지만 특별한 서점이다. 으레 쇼윈도를 장식하는 잡지와 진열장의 앞자리를 차지하는 학습참고서가 없어서 얼핏 보면 동네서점이 아니라 책 전시장 같다. 서너평 남짓한 내부의 양쪽 벽에는 문학·철학·역사·예술·교육·생태환경 등 주제별로 2,000여종의 수준 높은 인문서가 가지런히 꽂혀 있다.

    잘 팔리는 책만 모아놓은 매대를 보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현대미학강의’(진중권), ‘강의’(신영복), ‘코드훔치기’(고종석), ‘춘아춘아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갔니’(이윤기 외),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거의 모든 것의 역사’(빌브라이슨), ‘자발적 가난’(E.F.슈마허) 등이 이곳의 베스트셀러다.

    이 서점의 주인은 부산대 국문과 1학년때부터 15년째 학생들에게 독서지도를 해오고 있는 허아람씨(35)다. 아람샘이라고 불리는 그는 지난해 8월 제자들과 함께 인디고서원을 열었다. 독서교실 ‘아람샘’에서 자신이 학생들과 읽었던 책, 다른 청소년들이 읽기를 바라는 책만 모아놓은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서점’이다. 인디고란 이름은 1980년대 이후 태어난 자립적 아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인 ‘인디고세대’에서 따서 아이들이 붙였고, 운영도 4명의 학생이 책임지고 있다.

    인디고서원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서점 문을 열면서 아이들이 기획한 독서토론회인 ‘주제와 변주’에 다녀간 저자들의 면면이다. 지난해 10월 ‘소설 속의 철학’의 저자인 이왕주 부산대 교수가 다녀간 것을 시작으로 미학자 진중권씨(‘미학오디세이’·1월), 최재천 서울대 교수(‘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2월)가 초청돼 아이들과 함께 자신의 저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식목일인 지난 5일에는 ‘대한민국사’의 저자인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인디고서원을 찾았다.

    “아이들의 소박한 꿈에서 시작됐어요. 개점때 ‘틱낫한에서 촘스키까지’(존 스페이드 외)란 책으로 첫번째 주제와 변주를 열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라도 인디고서원을 방문했으면 좋겠다는 아이디어가 나왔거든요. 두번째 행사때 책의 저자인 이왕주 교수님께 연락을 드렸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지요.”(허아람씨)

    아이들은 책 밖으로 걸어나온 필자의 모습에 감동해 초청자를 난감하게 할 만큼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이왕주 교수는 “여러가지 가면(persona)을 갖고 인생을 살라”는 말을 들려줬고 진중권씨는 이상 때문에 철들지 않는 삶의 의미를 설명했다. 최재천 교수는 학부모들에게 “아이들의 방황은 그 자체가 인생의 길”이라며 “그 길을 청소하는 역할에 그치라”고 충고했다.

    대한민국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만큼 바쁜 이들을 움직인 것은 아이들의 순수한 자발성이었다. 한홍구 교수는 “바빠서 웬만한 강연회는 가지 못하는데 인디고 아이들의 제안은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의 강연에는 미리 ‘대한민국사’를 읽고 질문서를 낸 청중 100여명이 참석해 3시간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한교수의 메시지는 “현실을 바꾸려면 역사를 보라”는 것이었다.

    주제와 변주 기획위원인 이슬아양(고2)은 “처음에는 잔뜩 얼었는데 이제 선생님이 동네 아저씨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진우군(고3)은 “책을 필자의 가르침이 아닌, 생각으로 봤으면 한다. 그래야 상상력이 움츠러들지 않는다”고 보탠다. 허아람씨는 “작은 집단의 힘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인디고서원의 힘이 학생들의 독서에서 나오는 것은 물론이다. 아람샘에서 공부했던 아이들은 중·고등학교 시절 적어도 200권의 양서를 읽는다. 판에 박힌 청소년 도서를 뛰어넘고 두꺼운 책에 대한 두려움도 없다. 선생님이 제시한 목록 가운데 스스로 골라서 읽고 토론한다. 머릿속에 잘 정리되면 토론자료를 써올 필요도 없고, 책에 대한 강박관념을 주는 독후감은 사양한다.

    아람샘의 최고참인 박용준씨(고려대 철학과 4년 휴학중)는 경북 왜관에서 카투사로 근무 중인데 주말마다 부산에 내려와 고등학생 후배들의 철학수업을 지도한다. “인디고 아이들의 토론만한 진지함을 대학에서조차 찾기 어렵다”며 후배들을 자랑스러워 한다. 그는 고대서양철학에 관심을 갖고 독서 중이다.

    허아람씨와 책을 읽었던 아이들의 많은 수가 일류대학에 들어갔다. 이 때문에 외부에 비치는 아람샘은 독서논술지도를 잘 하는 사교육학원이다. 아람샘에 들어오기 위해 수백명의 대기자가 기다리고 있고, 인디고서원에 찾아와 논술에 도움이 되는 책을 골라달라고 부탁하는 학부모도 있다.

    그러나 인디고 아이들은 공부 잘하기 위해 책을 읽는 게 아니라 책을 읽다 보니 공부를 잘하는 경우다. 물론 재수를 하거나 성적이 안좋은 친구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즐겁고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살아가는 힘을 얻을 수 있다. 성적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은 이곳의 불문율이다.

    아람샘 학생의 학부모이자 교사인 이순남씨(분포고 사회과 교사)는 “전교조조차 편향된 시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느낌이 있다. 세상에는 사람수 만큼의 가치관과 양심이 있다고 할 때 인디고서원이나 아람샘을 통해 다양한 가치를 전달받는 건 아이들에게 큰 행복”이라고 말한다.

    성적지상주의와 함께 인디고 아이들과 아람샘을 괴롭히는 건 인문서의 부족이다. 원래 허아람 선생님의 독서목록은 3,000권 정도 되는데 1,000권은 절판돼 더이상 책을 구할 수 없다. 신간도 인문서를 구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부산의 대형서점을 1주일에 한번씩 돌아보지만 서평에 소개된 인문서가 없는 경우가 많다. 신간목록을 추린 뒤 유통업체에 주문해도 절반만 공급된다. 나머지는 출판사에 직접 주문, 직거래한다. “대형서점과 유통업체가 갈수록 베스트셀러 중심으로 바뀐다”는 게 허씨의 지적이다.

    인디고서원의 재무구조는 8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에 도달했다. 판매액 기준 30%의 외부고객과 함께 아람샘에서 인문서를 읽어대는 90명의 아이들이 책을 구입함으로써 자립이 가능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인디고서원은 예외적인 형태가 아니라 누구나 뜻이 있다면 운영할 수 있는 청소년 인문서점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인디고서원과 아람샘은 독서와 교육, 문화와 삶이 연계된 곳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 공간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른다. ‘이곳은 가게가 아닙니다. 책 대여점도 아닙니다. 이곳은 인디고 아이들의 행복한 공간입니다. 우리들의 기적의 공간, 아람샘 아이들의 작은 도서관, 행복을 나누는 가게, 참사랑 실천하는 일터입니다.’ 인디고서원의 벽에 붙은 이 문구는 책과 아이들이 만들어낸 가능성이다. 홈페이지 www.indigoground.net(5월5일 개통예정)

    부산 /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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