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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도서관이 살린 학교…고양 화수高

  • [경향신문 2005-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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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Ⅱ-1 도서관이 살린 학교…고양 화수高

    경기 고양시 덕양구 화정1동의 화수고등학교. 화정지구 달빛마을 아파트에 둘러싸인 이 학교의 중심은 도서정보실이다.

    본관 2층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은 도서정보실에서는 갓 입학한 1학년 학생들의 재량활동 수업이 진행된다. 신간 위주로 서고를 가득 메운 1만5천여권의 책 가운데 자기가 좋아하는 책을 마음대로 뽑아서 읽고, 교사가 제시하는 과제를 인터넷이나 CD·DVD 등 영상자료에서 찾기도 한다. 수업이 없을 때도 푹신한 소파에 앉아 만화나 잡지를 보는 학생, 컴퓨터를 사용하는 학생, 자료를 복사하는 학생, 책읽기에 빠진 학생들로 늘 북적인다. 도서정보실에 수시로 들르는 학생은 전교생 1,200여명 중 80% 정도. 공부나 엄숙함과는 상관없는 놀이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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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혜화(왼쪽) 전교장, 박경호 현교장을 중심으로 도서정보실 창가에 모인 학생들이 읽던 책을 들고 활짝 웃었다.

    화수고 도서관을 살아있는 공간으로 만든 사람은 지난 2월말 정년퇴임한 이혜화 전 교장이다. 1999년 그가 부임했을 때 화수고는 개교 3년을 맞는 신설학교였다. 더구나 9월에 개교하면서 인근 학교의 문제학생을 위주로 모집하는 바람에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소위 삼류학교였다. “아이들은 책과 담을 쌓아 수도권대학 진학이 최고 목표였고, 부모들도 그저 큰 말썽없이 졸업장이나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였다”는 게 그의 회고.

    이교장은 도서관에 손을 댔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옛날책 2,000여권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새 책을 확보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학부모 기증운동을 펼쳤으나 별 재미를 보지 못했다. 그래서 도교육청을 설득한 끝에 일부 예산을 확보했다. 공사 때문에 학교에 드나들던 건설업자에게도 “학교에 뭘 기증할 생각이 있으면 도서상품권으로 달라”고 했다. 교감으로 재직했던 일산동고 후배교사들이 취임축하 화분 대신 도서상품권을 들고 올 정도였다.

    책을 모으는 한편 아이들을 도서관에 끌어들이는 것도 큰 일이었다. 우선 24시간 편의점을 한다는 기분으로 밤 9시까지 문을 열었다. 아이들은 대개 오후 3~4시쯤 수업이 끝나면 교문 밖으로 줄행랑을 놓았지만 한 명의 발길이라도 잡으려는 것이었다. 또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 잡지, 무협지를 잔뜩 사다놓았다. 그래도 오지 않자 도서관에 막대사탕을 쌓아놓고 나눠주었다. 저녁식사 때면 가방을 싸는 아이들에게 컵라면까지 제공했다.

    장서가 늘고 아이들이 책읽기에 취미를 붙이면서 본격적인 공간 확보에 나섰다. 원래 교무실이 있던 본관 2층 교실 3칸반짜리 공간을 도서관으로 만들기 위해 교사들을 과목별로 나눠 여러 방으로 내보냈다. 도서관 담당교사 2명을 정해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전국의 잘된 학교도서관을 일일이 견학하도록 했다. 숙고를 거듭하다 2001년 도서관 수업, 책 열람, 비도서자료 이용이 가능한 현재의 도서정보실을 열게 됐다.

    마음고생도 적지 않았다. “저 교장은 왜 공부는 시키지 않고 도서관에 올인할까,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하는 식의 몰이해와 무관심이 힘들었다”고 한다. 무엇보다 가장 곤혹스러운 점은 아이들이 무협지나 만화만 뒤적거리는 것이었다. 흥미 위주의 책에서 시작하더라도 점차 양서로 옮겨가야 하는데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못읽게 하면 도서관에서 멀어질 터. 꾹 참고 기다렸다. 1년, 2년, 3년…. 아이들에게 서서히 변화가 왔다. 사탕과 컵라면, 만화와 잡지에 끌려 왔던 아이들 가운데 인문서를 읽는 경향이 생겼다. 한해에 180권을 읽는 독서광도 나왔다.

    khan050324b학생들의 한해 평균 대출량은 15~20권. 올해부터는 1인당 대출권수가 1주일 1권에서 2권으로 늘어 대출량도 높아질 전망이다. 교내외에서 독서관련 상을 받은 우대학생 100여명에게는 한번에 4권이 대출되며 거기서 한단계 더 올라가면 대출계에 사진을 붙여놓고 학생증 없이도 대출이 되는 특혜를 준다. 하루 2번 이상 찾아와 다양한 분야의 책을 빌려 가기로 유명한 심여울 학생(2학년)은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내려와 책을 읽는 게 학교생활의 즐거움”이라며 “여러가지 책을 읽으면서 내 꿈을 찾는 중”이라고 말한다.

    지역주민에게도 도서관이 개방된다. 장서수 1만권을 넘어 대출의 여유가 생기면서 주민등록증만 제시하면 누구나 5권까지 책을 빌릴 수 있도록 했다. 재작년 어머니책사랑반이 만들어지자 도서정보실 건너편 작은 방을 서당식 교실로 만들어 모임장소로 제공했다. 화수고 학부모 또는 예비학부모인 이들은 ‘꽃과 밥’이란 문집을 내며 학생들의 독서 분위기에 일조하고 있다.

    최근 화수고에 경사가 났다. 평준화 첫 회로 입학했던 올 졸업생 가운데 3명이 서울대에 합격한 것. 고양시내 23개 고등학교 가운데 가장 많은 수치여서 일약 명문이 됐다. 이교장은 “독서와 학습은 상반되지 않는다”며 “토론수업, 논술시험이 강조된 새 교육과정이 도서관을 학교의 중심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책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지만 자세히 보면 읽을 책이 없고 도서관이 재미없기 때문이라는 게 이교장의 지적이다.

    그는 “학교도서관은 동네 슈퍼마켓과 마찬가지”라는 지론을 펼친다. “동네 슈퍼는 늘 문을 열고 신선한 두부나 생선을 갖다놔야 손님이 오지 않습니까. 학교도서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선 아이들의 발길이 가장 많이 닿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것. 또 다양하고 흥미로운 신간을 갖춰놓고 관심을 끌어야 한다고 말한다. 대학 도서관, 국립도서관이면 모를까 학교 도서관에는 장서량만 채우는 고서는 필요없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엄숙주의를 버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숨소리조차 죽이며 바른 자세로 책을 읽어야 한다면 아이들에게는 다시 찾고 싶지 않은 고문실이 된다.

    신임 박경호 교장은 “올해 단행본 1,000권을 구입하고 잡지 24종을 정기구독할 계획”이라며 “도서관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또 이선희 사서교사는 “책과 자료들이 늘 서고를 떠나 있도록 활용도를 높이는 게 올해 중점목표”라고 설명했다.

    고양 |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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