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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7-02
    방향설정을 위한 전문가 대담

  • [경향신문 2005-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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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2 방향설정을 위한 전문가 대담

    khan050318
    허병두 교사, 도정일 교수, 박광성 사장(왼쪽부터) 등 세 대담자는 독서운동이 무조건 책을 읽어야 한다는 권위적 방식이 아닌 세련된 유혹이 되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 책을 읽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자기 삶의 주체로 서고, 공동체의 합의와 소통을 끌어내며, 문화적ㆍ경제적 독점을 경계하는 나눔의 실천이 돼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 대담은 지난 15일 오후 3시간에 걸쳐 진행됐다. | 김영민 기자




    책을 읽지 않을 이유와 권리도 있다

    박광성: ‘책 읽는 대한민국’이 보통사람의 일상생활에 어떤 의미를 줄지 생각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책 읽는 사회는 또 다른 획일성의 강요다. 책만 읽고 다른 제반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 게 아니라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사회를 어떻게 성숙하게 만들지에 대한 질문이 필요하다.

    허병두: 책을 읽자는 권유가 강박관념을 심어주면 안된다. 독서를 위한 독서에 그치면 안되고 책으로 출발하되, 책을 넘어서야 한다. 우리 사회의 독서운동은 권장도서 목록을 내놓고 무조건 읽으라는 권위적, 폐쇄적인 방식이 많다. 무엇을, 어떻게, 왜 읽을까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도정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책을 싫어할 이유가 있고 그럴 권리가 있다. 책 안읽고도 얼마든지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독서운동이 공동선이고 의로운 일이라는 환상에 빠지면 안된다. 단 읽고자 하고 읽을 수 있는데 읽을 수 없는 경우 기회의 사회적 평등을 확대해야 한다.



    책은 기억의 나눔, 사회적 나눔이다

    도정일: 그러나 인생이 유한하기 때문에 책이 효율적이다. 유한성을 뛰어넘는 수단, 유한성에 보복하는 한가지 방법이며 내가 타인, 세계와의 연결을 시도할 때 가장 값싸게 활용할 수 있는 매체다.

    박광성: 부의 독점 못지 않게 문화의 독점이 삶을 파편화시킨다. 이번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이 지식과 문화를 공유하고 삶에 함께 참여하는 제도적, 문화적 인프라를 구축한다는 문제의식을 보여줬으면 한다.

    도정일: 책읽기는 나눔이다. 잊어버리면 손해되는 기억의 사회적 공유가 필요한데 이 공유수단 가운데 가장 탁월한 매체가 책이다. 기억의 공유가 없으면 공동체의 도덕성이 기초를 갖지 못한다.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무엇을 꿈꿀 것인가 하는 미래의 비전을 나누는 부분에서 의미가 있다.



    책 읽기는 스스로 저자가 되는 것이다

    허병두: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세계를 만나게 해준다. 과거 독서에 대한 생각은 저자의 생각을 독자가 이해한다는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책을 읽는 것은 스스로 저자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책과 독자의 상호대화를 통해 새로운 책, 자기 삶의 저자가 될 수 있다. 인터넷시대의 상호대화성이 독서에 접목돼야 한다.

    도정일: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는 왜 살아야 하는가, 어떤 책을 읽을까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 연결된다. 책이라는 수단은 자기가 살고 싶은 사회, 방향, 가치를 생각하게 하고 그 원칙을 지탱하게 하는 힘이다. 자기 삶을 안내하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갖도록 만드는 수단이다.

    박광성: 사회적 갈등을 조정할 때 동문서답하는 경우가 많다. 소통의 길이 왜곡되고 막혀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책을 통해 얻는 이성의 훈련, 이성적 소통의 연습이 중요하다. 같은 의미지만 내면적·정서적 기율, 바탕의 사회적 공유도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개인적·사회적 이득이다.



    책은 사람을 만든다

    도정일: 인성은 도덕·윤리교육으로 안길러진다. 인간에게 있어 위대한 것은 무엇인가. 이런 감각을 기르는 게 인성교육인데 위대한 것에 대한 직관을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험담, 신화, 위인전을 보는 일이다.

    박광성: 추상적 의미의 개인의 자유, 네 멋대로 하라는 식은 전체주의로의 자발적 투항이다. 나를 찾고 우리와 만나는 길의 선순환적 관계가 우리 사회에서는 여러모로 닫혀있다. 책 읽는 삶이란 질서에 대한 열린 참여의 요소가 있다. 아이들의 자유와 자율을 추상적으로 강조하면서 엉터리 질서에 대한 맹목적 순응을 오랫동안 강조했다. 이런 요소를 경계하려면 질서나 보편이란 무엇인가, 공공선이 무엇인가에 대한, 책 읽기를 통한 기본훈련이 필요하다.



    책읽기는 매혹적인 강제여야 한다

    허병두: 아이들에게 책을 억지로 읽히려는 태도를 주변에서 많이 본다.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책 읽기가 돼야 한다. 스스로 골라서 읽도록 정교한 노력과 고도의 전략적인 교육이 필요하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권하기보다 너의 2세한테 권할 만한 책을 골라오라고 하면 태도가 완전히 바뀐다. 성적에 반영하느라 억지로 한 독서는 학습과의 관련이 끊어지면 끝난다. 책을 읽지 않는 어른은 잘못된 독서교육의 희생자다.

    박광성: 점수를 위한 책읽기가 한 인간의 영혼이나 삶의 위대성에 대한 깊은 체험을 주지는 않는다. 독서를 점수화의 틀에 가두면 안된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좀더 성숙한 경쟁을 만드는 데 책이 긍정적인 선순환의 기능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독서가 입시에 예속되면 안되지만 입시가 독서의 내적 충실함에 부분적 기여는 할 수 있다고 본다.

    도정일: 중·고등학교 독서는 입시와 연관되는 실리도 따져야 한다. 그런 점에서 국어뿐 아니라 수학·역사·사회 교사도 책을 안내하는 전과목 독서로 가야 한다. 입시에 필요한 지식을 강화하고 종합적 문맥을 파악할 수 있으므로 훨씬 나은 교육이 될 수 있다.



    책 읽기는 대학에서 강화돼야 한다

    박광성: 신자유주의를 거론할 필요도 없이 경쟁체제는 강화되고 거기서 피해갈 방법은 없다. 지식정보가 자기의 삶, 자기의 집단을 경쟁력 있는 것으로 만든다.

    허병두: 초·중·고 단계에서는 독서인프라 구축에 노력하고 지식기반사회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책읽기는 정작 대학에서 이뤄져야 하는데 손을 놓고 있다. 대학에서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에 맞춰 독서교육을 시켜야 한다. 고전을 그렇게 강조했는데 실제로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정일: 고전이란 것이 정보의 값어치로 따지면 쓸모없는 지식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전문교육이 필요한 대학에서는 고전교육이 어렵다. 교양필독서를 선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100권 중 80~90권은 수업계획에 반영해야 한다.



    책에는 정보사냥과 혼의 춤이라는 두 차원이 있다

    도정일: 그런데 독서에는 실리적 독서와 그것을 넘어선 다른 차원의 독서가 있다. 실리적 독서는 그것대로 받아들이지만 독서는 결국 정보사냥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혼의 춤’이란 차원으로 가야 한다. 자기를 즐겁게 하는 것, 자기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 그 차원을 망각하면 책읽기의 즐거움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허병두: 그런 점에서 성인들은 독서교육의 부재로 말미암은 희생자라고 볼 수 있다.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이자고 하는데 그럴 수 없다. 지금이라도 책을 즐겨 읽을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들어줘야 한다. 회사에서 책읽기를 강조하고 북돋아주면 경쟁력의 기초가 된다.



    책은 보통 사람의 전문가 시대를 연다

    도정일: 자기 생업과 직장에서 빠져나와 혼자 추구할 수 있는 화두, 지적인 질문을 찾아서 유지하고 관련 책을 자기힘으로 읽는 게 중요하다. 그러면 보통 사람들도 전문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역사연구는 학자만의 영역이 아니다. 고구려나 신라, 고려의 생활상이나 인물을 5년, 10년 단위로 뒤적거리다 보면 나름의 전문가가 된다. 어른들로 하여금 책의 세계로 들어오게 하는 한 방법이다. 직장 단위로 독서캠페인을 펼칠 경우 각자의 관심영역에 대한 결과물을 발표하게 할 수 있다.

    박광성: 성인의 독서를 삶의 활력과 떼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적·문화적 교양을 높이기 위해 좋은 음식점이나 여행 못지 않게 책읽기를 라이프스타일로 유행시키는 생활운동전문가, 프로모터들이 나와야 한다. 역사문화여행이 성인의 책읽기를 자극시켰던 경험도 갖고 있다. 386세대가 지속적으로 책을 읽고 기록하는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허병두: 독서는 즐거움과 이로움을 동시에 준다. 성인들의 문화적 성숙을 위해 책만한 게 없다. 청소년 독서교육의 틀을 짜면서 잘못된 교육을 받았던 성인들에 대한 애프터서비스도 해야 한다. 국가정책과 민간이 함께 협력해야 할 것이다.



    책을 읽지 않을 이유와 권리를 보호하면서도 독서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가능하다

    도정일: 책이 전부고 책만 중요한 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책이라는 것이 우리 삶에서 우선순위로 따질 때 10번째쯤으로 밀려나있다. 입시교육, 유혹적인 매체환경이 많아서 책에 신경쓸 틈이 없다. 책읽기 캠페인은 균형성장에 필요한 자양의 원천을 다원화하자는 차원이다. 잘 읽고 잘 쓰는 기본능력(리터러시)은 삶의 기초다.

    박광성: 책만 읽는 사회, 책도 읽는 사회가 아니라 삶의 기본적인 인프라 항목에 책이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질서와 미디어의 전환이라는 상황을 생각할 때 책이라는 미디어가 미래사회에 어떤 역할을 할지에 대한 회의적 느낌은 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해도 책 없는 사회라는 건 인류사회가 합의할 수 없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라는 영화를 보면 현자들이 수많은 책에 빠져서 즐거운 삶을 누리는 장면이 나온다. 영상시대의 총아인 영화가 책에 대한 묘한 외경을 보여주는 것은 성숙한 문제제기라고 생각된다.

    허병두: 독서는 삶의 유일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독단적 겁주기는 아이들뿐 아니라 성인의 독서마저 억압할 수 있다. 세련된 유혹의 형태로 가야지, 자칫 잘못하면 그 목표를 잃을 수 있다. 아이들에게 ‘너희가 책’이라고 말해준다. 독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책으로 만들고 삶의 주체이자 저자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각자 삶이란 책을 펼쳐봤을 때 향기로운 것이 됐으면 한다.

    정리 | 한윤정기자 yjha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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