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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5-06
    [경향신문 08-02-18]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 [경향신문 2008-02-18]
    “고전 소리내어 몸으로 읽는 현대판 서당 만들 것”?
    경복궁 옆 책방 ‘길담서원’ 여는 박성준 교수?



    3호선 경복궁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면 자하문으로 향하는 큰 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왼쪽에 인왕산, 정면에 북악산이 보인다. 이따금 지나는 곳이라 새로울 것도 없지만 이날 따라 저 산들의 나이는 얼마나 됐을까 궁금해진다. 그렇게 200~300쯤 걸었을까. 우리은행 주차장을 끼고 왼쪽으로 들어가는 작은 길. 그 ‘길’ 끝은 옛 서울의 모습을 간직한 한옥집 ‘담’으로 막혀 있다. 통인동 155번지. 이곳이 바로 책방 ‘길담서원’이 터를 잡은 곳이다. 평화운동가인 박성준 성공회대 겸임교수(68)는 기자를 보자 면구스러워했다. 찾아오는 사람을 막지는 않았지만 갑작스러운 인터뷰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탁자 위에는 얼 쇼리스의 ‘희망의 인문학’이 놓여 있었다.



    “그냥 작은 옹달샘 하나 판다는 생각으로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문도 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성공회대 NGO대학원에서 ‘평화학’을 강의하는 박교수는 이달 25일 인문학 책방을 열기 위해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한명숙 전 총리의 남편인 그는 소문대로 자상했다. “제가 끓이는 커피 맛있습니다”라며 손수 커피를 끓여 내왔다. 책방은 아직 어수선했다. 집에서 가져온 그의 책장과 책들이 한쪽 구석에 쌓여 있었고, 내부 수리가 진행 중이었다. 책방 이름이 왜 ‘길담’일까.?

    “‘길’이는 우리 아이 이름이고, ‘담’이는 제 친한 후배의 아이 이름입니다. 둘을 합한 거지요. 그 댁에서 먼저 제안했고 ‘길담서원’이라고 소리내 불러보니 울림이 좋아서 동의했습니다. 다양한 의미로 읽히더군요. ‘길에 관한 담론’ 또는 길(吉)한 이야기(談), 즉 ‘굿 뉴스(복음)’로도 읽히더군요. 오시면서 보셨겠지만 이 동네엔 ‘길’과 ‘담’이 어우러져 있습니다. 경복궁 담을 따라 가면 ‘길’은 자하문 밖으로 열립니다. ‘길‘과 ‘담’은 떠남과 머무름, 열림과 닫힘, 비움과 채움입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야 하지만 언제나 길 위에서만 살 수는 없고 담으로 둘린 안식처가 필요하지요. ”?

    길담서원에서는 인문·사회과학과 문학, 예술, 아동 분야의 책들을 다룰 생각이다. 생태, 생명, 우정과 자치를 강조하는 책들을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비치해 둘 생각이라고 했다.?

    “물론 제가 좋아하는 책만 취급할 순 없겠죠. 전문 연구자들의 자문을 받아 좋은 책을 선별하고, 특별히 ‘이달의 책’ 코너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책방 하면 망한다던데…’라며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는 지인들이 많지만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 변호사, 원불교 서울교구장 이선종 교무, 녹색평론의 김종철 대표, 창비의 백낙청 교수, 김지하 시인 같은 분들께 책방 일을 의논드렸고 따뜻한 격려를 받았습니다.”

    박교수는 이곳을 단순한 서점으로 운영할 생각이 아니다. 대화가 있는 공부방, 그리고 차와 음악이 있는 문화공간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우리 조상들이 했던 것처럼 고전을 소리내 몸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리(文理)가 트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체득할 수 있는 현대판 서당이 될 겁니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영어교육만 하더라도 생활영어, 영어회화가 마치 영어교육의 본령인 것처럼 여기는데, 고전적 가치가 있는 인문·사회과학의 양서를 풍부하게 읽는 가운데 덩달아 귀도 열리고 입도 열리고 생각도 깊어지는 공부가 진정한 영어공부가 돼야 합니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책방 주인이 된 것은 어쩌면 그에게 숙명인지도 모른다. 그는 전쟁통에 부모와 헤어져 남의 책을 베끼며 독학으로 공부해 대학에 진학했다. 1968년에는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돼 13년 반 동안 감옥살이를 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렇게 지난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책’은 늘 인생의 동반자였다.?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수업 도중에 영양실조로 쓰러졌습니다. 학교의 보호를 받으며 심부름 하는 아이로 일하면서 겨우 졸업했어요. 중학교 진학은 못했어요. 어느 여자중·고등학교의 급사로 일하며 숙직실에서 기거했지요. 남의 책을 빌려 밤새워 베꼈어요. 그런 식으로 내가 만든 책들을 몸에 지니고 다니며 틈틈이 공부했습니다. 4·19 나던 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요, 금지된 사회과학 책들을 접하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책들도 베끼기 시작했어요. 저는 책을 베끼는 데 비범한 능력이 있었거든요(웃음). 그러다 사건에 연루돼 구속되니까, 내가 베껴 쓴 책들이 모두 증거품이 됐어요. 그래서 과도하게 무거운 15년형을 받았죠. 감옥에 있을 때에도, 출옥한 후에도 책을 벗삼아 살았어요. 그러니 책방주인이 되는 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합니다.”?



    3년 전부터 그는 책방을 여는 꿈을 실행에 옮기려 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이유로 실현되지 않았다. 한번은 계약금을 치렀다가 돈을 날리기도 했다. 그러다 지난해 12월 심한 감기를 앓은 것이 결심을 굳힌 계기가 됐다.?

    “한달 가까이 감기에 걸려 외출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어요. 오직 할 수 있는 건 책 읽기뿐이었습니다. 그때 주로 읽은 책들이 녹색평론의 책들이었습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미숙 선생의 ‘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호모 쿵푸스’ 같이, 공부에 대해 쓴 책들도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요, 부산의 ‘인디고서원’에서 매달 추천하는 책들도 봤습니다. ‘아, 참 좋구나, 감기를 앓는 것도 이렇게 좋을 수가 있구나’ 생각했어요.”?

    감기가 낫자마자 녹색평론의 ‘이반 일리치 읽기모임’에도 가보고, 부산의 인디고서원과 ‘수유+너머’를 찾아갔다. 부산에만 3~4차례 내려갔고, ‘수유+너머’에 가서 젊은 사람들과 탁구를 치며 어울렸다. 그러다가 결국 아내인 한명숙 전 총리에게 ‘책방 개업’의 도움을 요청했다.

    “이렇게 작은 책방이지만 돈이 드는 일이죠. 빚을 얻었는데 저의 신용만으론 어렵고 그 사람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도 처음엔 가뜩이나 어려울 때 하필이면 장사도 안 되는 책방이냐고 했지만, 제가 행복해하니까 싫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그는 13년 넘는 복역기간 중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 다방면의 독서 편력을 거쳐 차츰 신학에 집중했고, 이 공부가 기반이 돼 81년 출소 후 일본에서 민중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으로 가 유니언신학교와 퀘이커 공동체 ‘펜들힐’에서 ‘평화’를 화두로 공부하고 수행에 정진했다. 그는 “나를 포함해 우리 모두가, 이제야말로 진정한 공부가 필요할 때”라고 말했다.?

    “민주정부 10년의 경험 이후 우리는 이제 재충전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생각이나 지혜가 동날 때도 됐어요. 진정한 공부가 없이는 이제 안 됩니다. 독서가 없는 마음공부는 공허합니다. 인문학적 책읽기가 정말 필요한 때입니다. 논어 위정편에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子曰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는 말이 나옵니다. 옳은 말입니다. 90년대 사회주의권이 붕괴되면서 사람들이 사회과학책을 손 놓아버렸지요. 명상, 영성, 마음공부 이런 쪽으로 기울어지는 사람들이 생겨났어요. 그것은 당시로서는 의미있는 일이었고 자기 성찰이라는 점에서 일면 발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릇’만 있고 ‘내용’이 없으면 진정한 성찰이 아닙니다. 그게 바로 ‘사이불학(思而不學)’에 가까웠습니다. 그런 유행에 편승해 요즘 처세술이나 명상법 같은 책들이 범람하는데, 그런 책들만 읽으면서 독서를 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한바퀴 돌아서 다시 원점으로 왔다고 봅니다. 개인의 삶도 그렇고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숭례문이 불 타버린 것이 ‘때의 징조’를 나타내는 상징적 사건입니다. 이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박교수는 ‘길담’이 위치한 통인동을 “서울에서도 기운이 좋은 곳”이라고 했다. 환경운동연합, 참여연대, 아름다운가게, 희망제작소 등 주요 시민단체뿐 아니라 청와대, 정부종합청사를 비롯한 주요 관공서들도 모두 걸어서 5~10분 거리에 있다. 그는 “이 좋은 기운에 가장 어울리는 게 바로 책방”이라며 웃었다. 대학가에서도 사라져가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을 경복궁 근처에 내는 그의 의중이 읽히는 대목이다.?

    “그분(공무원)들인들 어찌 목마름이 없겠습니까. 저는 그분들을 존중하고 신뢰합니다. 우리 시대가 경박하고 오염됐다면 저도 그 한 부분입니다. 큰 강물도 시원(始原)은 산속에 숨겨진 작은 옹달샘이거든요. 목마른 길손이 우연히 찾아왔다가 목을 축이고, 잠시 쉬었다 돌아가 친구들에게 알리고 싶고, 그 길을 지날 때 다시 들르고 싶어지는 곳. 그런 곳이 됐으면 합니다. 부산에 ‘인디고서원’이 있다면 서울에는 ‘길담서원’이 있습니다. 다른 곳에는 그 지역 특색에 맞는 또 다른 ‘서원’들이 생겨나길 기대합니다.”?

    박성준 교수는
    1940년 경남 통영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때 부모와 생이별한 그의 어릴 적 소원은 “밥 한 그릇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중학교 급사생활을 하며 독학으로 서울대 상대에 입학, ‘경제복지회’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김근태 의원과 부인 한명숙 전 총리가 동아리 후배다. 67년 한전총리를 미팅으로 만나 결혼한 박교수는 결혼 6개월 만에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됐다. 출소 후 신학박사 학위를 받아 2001년부터 성공회대에서 ‘평화학’ 강의를 해오고 있으며 비폭력평화물결과 아름다운가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글?손제민·사진?우철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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