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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9-08-14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 임꺽정-고미숙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소수의 가치

     -고미숙의 『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좌장 고미숙씨의 직업은 고전평론가다. 한국 고전문학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그의 업이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텍스트에 주석을 다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텍스트를 자기 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여 자신만의 화두를 던지는 재료로 활용한다. 독자의 취향에 따라서는 종종 밍밍할 수도 있을 고전문학 텍스트를 왕성한 식욕으로 되새김질해 먹음직스런 지성의 반죽을 빚어 내는 게 그의 솜씨다. 이미 전작 <열하일기-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에서 입증된 바 있다. <임꺽정-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에서도 그 솜씨는 여전하다. 
      

    제목 그대로 책이 다루는 대상은 벽초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이다. 그러나 <열하일기>와는 달리, 벽초의 10권짜리 대작이 처음부터 저자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아니다. 애초 출판사의 요청에 못이겨 시작한 <임꺽정> 읽기는 귀찮은 ‘의무방어전’에 가까웠다. 그러나 세 번 책을 완독했을 때, 그는 더 이상 투덜거리지도 의아해 하지도 않았다. 벽초가 사료를 바탕으로 종횡무진 엮어낸 일곱 도적들의 이야기가 “몸 속으로 들어와 끊임없이 세포들을 도발”했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이유를 말로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자신이 텍스트와 사랑에 빠진 이유를 명료한 언어로 제시하는 것은 평론하는 자의 숙명이다. 저자는 이처럼 자신을 관능적인 독서의 희열로 달뜨게 만든 소설 <임꺽정>의 매력을 모두 7개의 장으로 구분해 풀어놓았다.
      

    그 매력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탈주’다. 그것은 위계와 관습으로부터의 탈주, 고정되고 경직된 것으로부터의 탈주다. 소설 속 칠두령은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돈다. 붙박이로 사는 자의 가치관이 뿌리내릴 여지가 없다. 직업적 노동에 기반한 생계 유지, 결혼과 출산을 통한 가정의 형성, 사회적으로 승인된 부와 지위의 획득 같은 것들은 이들의 관심 밖이다. 남녀는 복잡한 구애의 과정없이 눈만 맞으면 바닥에 엎어지고, 양반과 상민과 천민이 뒤섞인 군상들은 나이와 신분을 넘어 교유하며, 말이 통하는 자라면 하룻밤 인연만으로 생계를 책임지기도 한다. 이들에게 윤리가 있다면, 그것은 ‘권력과 위계’의 윤리가 아니라 오로지 ‘우정과 연대’의 윤리가 있을 뿐이다. 
      

    그 탈주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인간상은 ‘자유인’이다. 자유인의 삶을 추동하는 힘은 누구에게도 머리 숙이지 않는 ‘야생적 자존심’이다. 칠두령은 흔히 알려진 것과는 달리 혁명가도 아니요 ,민중의 대변자도 아니다. 야생적 자존심을 바탕으로 ‘그저 자신의 길을 거침없이 갔을 뿐’, 그들이 관군과 싸운 것은 계급의식이나 민중에 대한 사랑의 발로가 아닌 탓이다. 그러므로 이들이 체화하고 있는 것은 다수의 가치가 아닌 소수의 가치, 메이저의 가치가 아닌 마이너의 가치다. 그럼에도 이들은 축제와 사랑과 배움의 기쁨을 누릴 줄 안다. 책의 부제가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이너리그의 향연’인 이유다. 
      

    국가 권력의 입장에서 자유인은 존재 자체가 불온하고 반역적이다. 공권력의 힘으로 쉽게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없는 탓이다. 수평적 연대로 결합한 시민의 힘은 이미 지난해 촛불집회가 생생하게 증명했다. 저자는 임꺽정과 칠두령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위에 맑스가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말한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꼬뮌주의 사회”의 모습을 포개놓는다. 그리하여 현실에서는 미완의 꿈이고 소설에서는 엄연한 현실인 ‘자유인들의 결사체’를 주문하는 이 책은, 저자가 이 답답한 시절에 내미는 ‘불온한’ 탄원장이다.

     

    정원식.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소수의 가치." 『Weekly 경향』. 2009, 834, 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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