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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1-04-18
    [2011-03-17] ‘논어’의 행복론

  • 공자의 ‘논어’ 첫 장은 세 절로 구성되어 있다. 제1절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2절은 “유붕자원방래 불역낙호”(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3절은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이다. “배우고 또 실천하니 기쁘지 아니한가. 벗들이 먼 데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고교 시절 한문 선생님한테서 ‘논어’의 이 첫 장을 소개받았을 때 반 아이들을 압도한 것은 감동이 아니라 실망스러움이었다는 기억을 나는 갖고 있다. 그 기억은 너무도 생생하다. 그때 한문 선생님은 “사람을 바꾸어놓는 것이 스승이고 교육이다. 공자 이후 지금까지 공자만한 스승은 없었다”라는 말로 공자를 소개해놓고 우리에게 ‘논어’의 뚜껑을 열어보였는데, 잔뜩 기대에 부푼 아이들의 귀에 들려온 그 ‘논어’ 첫 장의 ‘공자말씀’은 그렇게 밋밋하고 미적지근하고 흐리멍덩할 수가 없었다. “그게 공자말씀이야? 그런 소리라면 나도 할 수 있어.” 그렇게 반응한 아이도 있었고, 나중에 한문 시험 때 “물에 물을 탔으니 물맛이 좋지 아니한가-공자말씀”이라 써냈다가 교무실로 불려가서 석탄 난로의 큰 물주전자를 머리 위로 받쳐 들고 한참 벌을 선 아이도 있었다.

    배우고 공부하고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고 실천과 결합시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게 될 때까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의 진실은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 배움과 실천의 결합이 ‘기쁜’ 일이 되자면 최소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 실행으로 옮길 만한 배움이란 옳고 바른 배움, 만인에게 유익한 배움이어야 한다. 도둑은 배운 것(기술)이 제 아무리 뛰어난 것이라 해도 그 배움이 만인 앞에 떳떳하고 만인에게 유익한 것이 아니므로 그가 배운 것을 실행한다 해서 그 지행(知行) 결합으로부터 그가 일시적 이득은 몰라도 항구한 기쁨을 얻기는 어렵다. 둘째, 배우기는 바르게 배웠는데 그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지 못하거나 옮길 수 없을 때에도 기쁨은 오지 않는다. 배움과 실천의 분리는 일종의 마비이며, 이 마비는 사람을 슬프게 할 수는 있어도 기쁘게 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읽다보면, ‘논어’ 첫 장 제1절은 사람이 어느 때 기쁨과 즐거움을 얻게 되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로 다가온다. 그 통찰 속에 ‘논어’의 행복론이 들어 있다. 그 행복론의 요체를 ‘탁월성’의 문제와 연결해서 정리하면 이러하다. 첫째, 듣고 배운 것이 혼자만의 이득을 넘어 만인 앞에 떳떳하고 만인에게 유익한 것일 때에만 그 배움은 ‘탁월한’ 배움이다. 둘째, 배움과 실천이 따로 놀지 않을 때, 바르게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길 수 있을 때에만 그 실천은 ‘탁월성’을 획득한다. 앞의 것은 귀의 탁월성을, 뒤의 것은 손의 탁월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 탁월성이 삶의 행복을 결정한다. 현대인이 자주 불행감에 시달리는 것은 그의 삶의 방식, 가치관, 태도가 그 두 가지 탁월성과는 아주 먼 거리에 있기 때문이다.

    “벗들이 먼 데서 찾아오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논어’의 이 둘째 절에도 깊은 행복론이 담겨 있다. 먼 데서 찾아오는 이 ‘논어’ 속의 친구는 무슨 인사 청탁을 위해 ktx 타고 오는 사람도, 승용차 몰고 권력을 빌러 오는 아첨꾼도, 이득과 영달을 노려 비행기로 날아오는 기회 사냥꾼도 아니다. 그는 그냥 친구이고 벗이다. 그 벗이 벗을 찾아오는 이유는 서로 벗을 알아보고 벗을 만나는 것이 ‘무조건’ 즐겁고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이 무조건의 관계가 ‘우정’이다. 불원천리로 벗을 찾아오는 벗에게는 벗을 만난다는 것 말고는 아무 다른 목적이 없다. 그에게 벗은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인 존재, 그가 이 세상에 있다는 것 자체가 사람을 기쁘게 하고 즐겁게 하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이런 무조건의 우정이 성립하자면 두어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벗은 벗을 알아볼 귀와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둘째, 벗과 벗 사이에는 깊은 신뢰와 정신의 공유가 있어야 한다. 이런 눈과 귀와 신뢰의 능력은 이득, 영달, 권력에의 기대가 아니라 그런 것들을 넘어선 곳에서 나오고 그런 것들보다 더 크고 본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정신의 품질에서 나온다. 정신의 그런 품질을 우리는 ‘정신의 탁월성’이라 부를 수 있다. 이런 탁월성을 가진 사람은 즐겁고 행복하다. 그는 그의 벗이 철새처럼 시류에 따라 오가고 정상배들처럼 모종의 이용가치를 노려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현대인이 불행감에 자주 시달리는 것은 이런 인간관계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에 대한 그의 훈련된 거부감과 불안감, 그리고 그런 우정관계가 그의 삶에는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단정해버리는 타산적 사고가 그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 ‘논어’ 첫 장의 행복론을 마무리하는 이 제3절은 우리의 병든 영혼을 위해 공자가 일찍 준비한 ‘복음’ 같은 데가 있다. 남이 알아주지 않으면 불같이 화내고 남들의 눈을 잡기 위해 조석으로 안달하고 그러다가 안 되면 저주를 퍼붓는 사람들, 그게 ‘우리’다. 그 우리는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수가 없다. 행복이 전적으로 남들의 시선 여하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이 시선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공자 복음에서 새겨들을 얘기는 참 많다. 그러나 그 얘기를 오늘 해 떨어지기 전에 다 끝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음 차례로 미루어두자. 이미 독자들이 눈치 챘겠지만, 나의 ‘논어’ 첫 장 읽기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정’(philia)론과 ‘행복’(eudaimonia)론을 ‘논어’에 접목시켜보자는 의도도 담고 있다. 물론 그 얘기도 다음 칼럼에 이어진다.

    <경희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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