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뉴욕타임스 인터넷판에는 이 신문 칼럼니스트 애덤 브라이언트가 쓴 흥미로운 기사 한 건이 올라 있다. “씨이오들에게서 지혜를 끌어내기”라는 제목의 기사다. 사람이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는 데 꼭 필요한 후천적 품질 다섯 가지만 꼽는다면 무엇 무엇인가? 저명 씨이오(CEO) 70명에게 이 질문을 주고 그에 대한 응답을 받아낸 글이다. ‘후천적 품질’이라는 말이 재미있다. 타고난 능력이나 재능처럼 개개인의 통제권 바깥에 있는 생래적 자질들 말고 습관, 태도, 기율 같은 통제 가능한 요인들을 통해 사람들이 몸에 붙이기도 하고 붙이지 못하기도 하는 것이 후천적 품질이다. 선천적 재능이 신의 선물이라면 후천적 품질은 내가 내게 만들어 준 선물이다. 그런 후천성 품질들 가운데 씨이오들이 성공의 조건으로 가장 많이 꼽은 것, 그래서 다섯 개 품질 조건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것은 ‘열정적 호기심’이다. 호기심이 반드시 후천적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법하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면 호기심의 후천성 부분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섯 살짜리 아이들은 호기심덩어리다. 그 무렵의 아이들은 대체로 질문의 천재들이다. 질문이 많다는 것은 궁금한 것이 많고 호기심이 왕성하다는 것의 반증이다. 그런데 그 호기심덩어리 아이들이 소년기, 청년기를 지나 어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은 제각각 다르다. 어떤 아이는 계속 호기심 많은 소년, 청년, 어른으로 자라고 어떤 아이는 호기심을 어디 반납해 버린 듯 질문 없는 사람으로 자란다. 인간은 누구나 호기심 많은 동물로 태어난다는 점에서만 호기심은 생래적인 것이다. 그 의미의 호기심은 자연이 준 ‘평등한’ 선물이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자기를 형성하는가에 따라 자연의 그 평등한 선물은 ‘불평등한’ 후천적 품질로 바뀐다. 다수의 씨이오들이 열정적 호기심이라는 말로 의미한 것은 무엇보다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다. 사람들은 왜 어떤 일에 매달리는가? 어떤 이는 왜 이렇게 행동하고 어떤 이는 저렇게 행동하는가? 같은 일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해볼 수는 없는가? 사람들은 무엇을 원하는가? 어떤 이는 왜 이런 것을 원하고 어떤 이는 저런 것을 원하는가? 나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나는 그 일을 ‘왜’ 하는가? 무엇을 위해서? 나는 왜 저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가? 내가 나에게 지고 있는 책임은 무엇이며 너에게, 혹은 타인들에게 지고 있는 책임은 무엇인가? 인문학의 관점에서 말하면 인간에 대한 이런 호기심은 인간을 알고 이해하려는 지적 열정이다. 인간은 ‘나’라는 단수 존재와 ‘너’를 포함한 ‘타자’라는 복수 존재들의 집합이다. 나를 알고 너를 이해하려는 인간 탐구의 열정을 성공의 첫 번째 자격조건으로 올린 씨이오들은 말하자면 그들 나름의 ‘인문학도’이다. 아닌 게 아니라 브라이언트 기자가 만난 씨이오들 중에는 이런 말을 한 사람이 있다. “나는 인간성을 탐구하는 학도입니다(I am a student of human nature).” 그런데 ‘품질’ 문제와 관련해서 좀 더 자세히 따져 볼 것이 있다. 누가 무슨 일을 왜 하는가라는 것은 그 사람의 행위동기와 행동목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 그러나 동기와 목표를 ‘이해’하는 일만으로는 충분치 않을 때가 많다. 동기와 목표를 이해하는 일 이상으로 궁극적 차원에서 중요한 것은 ‘품질(quality)’이라는 문제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라는 것은 품질 차원에서 보면 점수가 거의 빵점이다. 남들이 소를 말이라 하고 개를 고양이라 부른다면 나도 소를 말이라 하고 개를 고양이라 부를 것인가. “이렇게 하면 남들이 칭찬하니까 나도 한다”라는 것 역시 품질은 거의 제로다. “남들이 알아주니까 한다”라는 것도 그 품질 수준은 거의 바닥이다. 칭찬과 인정은 사회적으로 요긴한 데가 있다. 그러나 남들이 칭찬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하다가도 그만두고 알아주지 않으니까 하지 않기로 한다면 나의 생각과 판단은 어디에도 없고 그 일 자체가 할 만한 일인가 아닌가에 대한 나의 가치분별이나 신념도 찾아볼 수 없다. 누가 뭐라 해도 이 일은 할 만한 일이니까 한다는 판단과 가치관과 신념이 개입할 때에만 ‘품질’이라는 것이 나온다. 그리고 그 품질 유무가 우리의 행복을 좌우하고 좋은 삶의 가능성 여부를 결정한다. 행복은 최종적으로 품질의 문제다. 공자의 ‘논어’ 첫 장 제3절에 나오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않으니 군자답지 않은가(人不知而不? 不亦君子乎)”라는 구절은 품질과 행복의 연관관계에 대한 탁월한 관찰이다. 남들이 알아주건 않건 할 만한 일이라면 하라.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화내지 말라. 할 만한 일, 해야 할 일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나는 내게 부끄럽고 초라한 인간이 된다.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다 해서 불같이 화내고 삿대질하고 깔았던 멍석도 걷어치운다면 나는 대체 나에게 무엇인가? 병든 영혼이 아니라면? 남들의 시선이 너를 좌지우지할 수 없게 하라. 네 영혼이 병들면 행복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것이 공자의 가르침이고 ‘논어’의 행복론이며 동양담론의 전통이 ‘수양’이라는 말에 담고자 한 핵심적 의미다. ‘논어’의 ‘군자’는 현대적으로 풀면 외물(外物)에 흔들리지 않고 시류에 떠내려가기를 거부하는 ‘내적 견고성의 인간’이다. 지금은 그런 견고성의 인간을 우습게 아는 시대다. 그래서 공자 말씀이 더 소중해진다. 품질은 그 내면적 견고성의 다른 이름이며, 그 품질이 내가 나와 관계 맺는 길의 요체다. 도정일 <경희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