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오늘날의 환경에서 나영이 본인이 의지를 갖는다는 건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은 늘 권력과 부를 바래왔지만 요즘은 돈 쪽이 더 강한 목적이 되었다. 자본의 시대에는 계산기를 두드려 비용 대비 산출을 따진다. 경제학의 입장에서 비교해보라. 아무 성과가 없을 리스크를 감수하고 나영이에게 각종 명목의 투자를 할 때 얻는 효용과, 그 돈으로 지금 당장 옷이나 장신구를 사줄 때의 효용을. 투자자와 나영이 모두 전자를 택하기 힘들다.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미래를 기약하는 사람보다, 무슨 짓을 해서든 당장의 지출이 많은 사람을 이 사회는 우대하고 있지 않던가. 가난한 학자보다는 돈 많은 조폭이 이 사회의 주류에 좀더 가깝지 않던가. 그러니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 나중에 얻을 더 큰 효용을 감안해서 미래를 대비할 이유를 나영이가 어떻게 찾겠는가. 그리고 누가 거기에 투자를 하겠는가.
내가 줄곧 나영이의 공부를 염두에 두었던 이유는, 검정고시조차 치르지 않았을 때 받게 될 사회의 편견이나 불이익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기 삶에 대한 의지를 가지기 위해선 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직접 경험을 통해서도 배울 순 있다. 그러나 그 뼈저린 모멸감보다는 미리 배우는 편이 훨씬 낫다. 하지만 의지가 생기지 않으면 배울수 없고 배우지 못하면 의지가 생기기 어렵다. 입구가 없다. 그 안타까움이 내가 나영이를 계속 붙잡고 있었던 가장 큰 이유였겠다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오늘날의 초중등 교육은 근대의 산물이므로 그걸 극복하고 포스트모던한 현대에 적응하기 위해선 우선 근대적 사유의 틀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실제 인간의 삶 앞에선, 이런 관념적 논의는 나를 아무데도 데려다 주지 못했다.
- 먹물. 『가출 소녀와의 동거』. 책마루, 2010. 1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