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제가 영화를 본지가 오래돼서. 어떤 영화를 찍으셨나요?"
그는 잠시 생각해봤다.
"어떤 영화를 찍었다기보다는 어떤 여자를 찍은 거죠."
"돈이 많은 모양이네요. 한 여자를 위해서 영화를 다 찍고."
"그래서 지금은 코끼리 한 마리만 남기고 빈털터리가 됐어요."
"코끼리? 정말 부자였나 보네요."
Y씨가 기분 좋게 웃음을 터뜨렸다. 폐암 다음에는 헤르페스가 찾아 왔고, 그 다음에는 죽어야만 끝낼 수 있는 신장 투석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리고 거기 있다고 생각하지만, 존재를 증명할 길은 요원한 '제발'이 늘 존재하고 있었지만, Y씨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런 사실을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제 말이 다음 작품을 찍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네요. 제목이 뭐라고 하셨더라."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에요."
"그 영화로 다시 부자가 되기를 바라요. 코끼리 먹이 살 돈은 있어야만 할 거 아니야. 취재를 더 하고 싶으시면 토요일에 다시 오세요. 암환자를 위한 고궁 산책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으니까. 물론 내가 만든 모임이에요."
"알겠습니다. 다시 또 오겠습니다."
두 사람은 출구를 빠져나와 고궁 앞 광장을 가로질렀다. 아직 해가 지려면 멀었고, 하늘은 한낮과 다름없이 환하고도 파랬다. 혼자서 걷기 시작할 때, 사람들은 저마나 다른 곳에서부터 걷기 시작한다. 저처럼 한낮과 다름없이 환하고도 파란 하늘에서, 혹은 스핀이 걸린 빗방울이 떨어지는 골목에서, 분당보다도 더 멀리, 아마도 우주 저편에서부터. 그렇게 저마나 다른 곳에서 혼자서 걷기 시작해 사람들은 결국 함께 걷는 법을 익혀나간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았다. 그들의 산책은 마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동물들과 함께하는 산책과 같을 것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주차장을 빠져나온 그들의 눈앞으로 버스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4차선 도로를 봉쇄한 경찰들이 보였다. 어디선가 함성이 요란했다. 두 사람은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바라봤다. 검은색 진압복을 입고 열을 맞춰 앉아 있는 경찰들과, 그보다 뒤쪽에서 무전기를 든 손으로 팔짱을 끼고 그들을 바라보는 지휘관들과, 그보다 더 뒤쪽에서 대기하고 있는 살수차와, 앞쪽에서 서로 뒤엉킨 채 버스와 담벼락 사이를 막고 선 또 다른 경찰들과, 그들의 검은색 투구에서 2미터 정도 위쪽으로 지나가는 바람과, 어디선가 들려오는 함성과, 또 함성과, 또 라는 함성과..., 고통, 아아, 그 고통을.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또 오랑우탄이나 코뿔소, 토끼, 어쩌면 매머드나 티라노사우루스같은 것들을.
"어때요? 괜찮아요? 조금 더 걸어볼까요?"
Y씨가 그를 바라보면서 물었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더 걸어보자는 말이지요? 그래요, 이 거리. 제가 좋아하는 거리니까."
그리고 그녀와 꼭 붙어서 다니던 거리니까.
"맞아요. 저도 좋아하는 거리예요."
그렇게 걸어가는 그들을 향해 무전기를 든 경찰 하나가 두 팔로 X자를 만들어 보인뒤, 오른손을 뻗어 길 뒤쪽을 가리켰다. Y씨와 그는 경찰이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라봤다. 또한 코끼리와 지네와 베짱이와 수컷 사마귀와 함께. 그것을.
- 김연수.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김연수 외. 『제 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09. 28-3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