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신'은 과거와의, 또는 전통과의, 아니면 미래와의 '연속성'을 전제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모든 행동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복합적인 과정의 한 계기일 것을 전제한다. 이러한 과정에 대한 책임, 이러한 과정에 한 역할을 맡는다는 책임, 외형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스스로 적극적이며 언제나 준비되었다고 느끼는 세력들과--이들에 대해서는 마치 이들이 '실체적'이고 현재적인 외형을 지닌 양 설명된다--연대하였다는 책임, 이러한 책임이야말로 어떠한 뜻에서 '국가정신'이라고 할 수 있다. 분명 그러한 '지속'(duration)에 대한 자각은 구체적이어야 하며 추상적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지속에 대한 자각은 어떠한 뜻에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는 안 된다. 그 가장 좁은 한계를, 지나간 한 세대와 앞으로의 한 세대라고 하자. 이것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 세대라는 것을 각각 30년씩이라는 식으로--곧 지나간 30년과 앞으로 올 30년--간단하게 계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 계산은 유기적인 것이어야 하는데, 그 까닭은 적어도 과거에 관한 한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자신이 지금은 대단히 연로한 노인과 연결되었음을 느낀다고 하자. 그때 그 노인은 우리에게서 우리들 속에 살아 있는 과거이고, 우리가 알아야 하고 의지해야 할 과거이며, 현재의 한 요소이고 미래의 한 전제인 과거이다. 우리는 또한 우리 자신이, 이제 태어났고 자라나는 세대이며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세대인, 우리의 아이들에게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전통에 대한 숭배는 경향적인 뜻을 지녔으며 따라서 성격이 다르다. 그것은 선택과 한정적인 목표를 함축하는,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의 기초이다) 이러한 뜻에서의 '국가정신'이라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주 그것의 왜곡과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에 대해 싸운다.
- 안토니오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이상훈 역. 거름, 2006. 16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