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는사회’ 9월의 독서토론이 9월 28일 7시 대학로에 있는 책사회 강의실에서 직장인과 학생 등
시민 7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성황리에 개최되었습니다. 이번 토론에서는 고병권 씨의『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바탕 텍스트로 삼아 민주주의를 다시 한 번 사유해 보고, 안철수 현상 등 서울 시장
후보를 놓고 벌어진 최근 한국의 시민민주주의 경향을 진단해보며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토론은 한겨레 신문의 고명섭 기자가 진행을 맡아주었고, 수유너머에서 활동하는 박정수 선생과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김윤철 교수가 토론자로 참여해주었습니다. 함께 해 주신 세 분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9월의 토론은 주어진 시간을 두 파트로 나누어 먼저 한 시간 남짓 패널들과 토론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청중과 함께하는 자유토론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이 책 머리말에서 저자는 '책은 민주주의와 같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책은 하나의 이견을 표출하는 것이고
차이를 표명하는 것이고, '따라서 책을 쓰는 일은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민주주의를 실천한다'(4)는 것인데,
생각해보면 토론도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아니 토론이야말로 이견을 제출하고 차이를 생산하는 일, 그래서
민주주의를 연습하고 실천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두 분 선생님들과 함께 풍성한 민주
주의적 토론의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고명섭 기자)".
<나는 왜 민주주의에 대해 썼는가> - 고병권
(출판사 그린비 블로그에서 발췌 http://greenbee.co.kr/blog/1407)
# 민주주의를 다시 쓰는 이유
솔직히 나는 지금의 ‘데모크라시’(democracy)를 ‘엘리토크라시’(elitocracy)와 구별할 수 없다.
‘데모크라시’ 즉 ‘데모스의 힘’이라는 말은 ‘엘리트의 힘’을 치장하는 공문구나 거죽에 불과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정치엘리트들이 제 아무리 고개 숙이고 납작 엎드려 절을 한다 해도, 그것은
일종의 ‘대중 획득술’ 내지 ‘대중 낚기 게임’처럼 보인다.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버려본 적이 없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조차, 민주주의를 집권자의 고민이나 집권자가 되기
위한 고민으로 축소시켜 버리곤 한다. 민주주의를 엘리트 정당들의 대중획득술로 만들거나,
대권을 향한 공학 계산 문제로 전환시키는 것을 지금 얼마나 자주 보는가.
"민주주의란 인민이 자기 삶을 관리하고 육성해 줄 좋은 대표를 찾는 일처럼 간주되곤 했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좋은 목자를 고르는 일이 아니라, 대중이 양떼로 전락하지 않는 일일 것
이다(『민주주의란 무엇인가』109쪽)."
# 민주주의-하나의 예
희망은 허망하다. 그러나 절망이라고 별 것이 있던가. 그것 역시 허망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의 최대 위험은 불빛을 보고 부나방처럼 마구 뛰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위험하다.
물론 어둠 속에서 절망해도 안 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둠을 직시하고 묵묵히 걸어갈 밖에.
그때 환우회에서 온 분이 훌쩍였다. 빛을 찾으러 왔는데, 어둠을 직시해야 한다는 말에 울음이 나온다고 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나는 거기서 민주주의를 봤다.
그것은 내가 플라톤의 『국가』에서 봤던 동굴 속 사람들의 이미지와는 반대였다. 나는 그 야학에서
수십 년 간 사슬에 묶여 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간혹 만나곤 했다. 중증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집이나 시설에 묶여 있었던 사람들. 하지만 그들은 ‘이데아’라는 신의 세계로 뛰어가지 않았다.
소위 ‘정상인’이라는 인간의 ‘이데아’를 원하기는커녕 그들은 그것과 싸웠다. 그 ‘이데아’가 구원이기는커녕
차별을 생산하는 ‘척도’ 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 민주주의를 쓰기 위해 민주주의를 다시 읽었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이 책은 내 맘 속 서판에 적힌 민주주의를 바꿔 쓰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만든
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연대의 표시이다.
핵심 질문1.
저자는 이 책에서 민주주의, 영어로 데모크라시라고 하는 민주주의라는 말을 뿌리까지 파고들어가서
그 뜻을 살펴봅니다. 저자의 설명을 보면, 직접민주주의가 처음 실험되고 발흥했던 고대 그리스에서
‘데모크라티아’란 민중.인민을 뜻하는 데모스와 힘을 뜻하는 ‘크라토스’가 합쳐진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민주주의를 ‘데모스의 힘’, 다시 말해 인민의 힘, 민중의 힘이라고 재정의합니다. 이 데모스의 힘이라는
재정의가 말하자면 이 책의 입론의 주춧돌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이 말을 가지고 저자는 민주주의 하면
떠오르는 것들, 가령 다수의 지배(다수결), 국민주권, 대의제, 이 세 가지를 비판합니다. 매우 과감한
이론적 도전이라 할 수 있는데요. 두 분 선생님께서는 이런 정의(민주주의=데모스의 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해석해도 되는 걸까요?
핵심질문2.
저자는 플라톤의 『국가(정체)』 7권의 동굴 우화에서 흥미로운 쟁점을 끌어내고 있습니다(20).
여기서 플라톤이 부정적으로 말했던, 동굴 안의 어둠을 더 적극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거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둠, 잉여, 위반의 요소를 부정이 아닌 긍정의 요소로 받아들이는 것인데요(30).
그러면서 이 책은 하나의 역설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모든 것이 대낮같이 밝고 모든 소통이
투명하게 이루어지는 사회는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라고 하는데, 이 주장이 우리의 통념에
도전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우리는 민주주의 하면 소통을 그 핵심으로 삼고, 투명하고 거리낌
없고 대낮처럼 밝은 소통이 가장 좋은 소통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민주주의와 거리가 멀다고
말하는 것이거든요. 심지어 이 책은 “오히려 그것은 모든 것을 방해 없이 지켜보려는 권력자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사회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수긍할 만한 생각으로 다가옵니다.
두 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핵심질문3.
이 책의 저자는 민주주의를 다수결 혹은 다수의 지배와 동일시하는 것을 매우 강도 높게 비판합니다.
“만약 수적인 다수로 모든 걸 결정하는 정체를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부른다면, 민주주의 이념이란
기껏해야 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식과 통념 이상이 아닐 것이다. 나는 이 경우 통념에 맞선 소수적
투쟁이야말로 민주화 투쟁에 합당한 이름이지 다수 의견을 이유로 그것을 제압하는 게 민주주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41)” 이렇게 말하는데, 민주주의와 다수결, 또는 민주주의와 소수자의 관계를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핵심질문4.
저자는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국민과 주권을 비판합니다. “민주주의라는 이름은 또한 국민주권의
실현이기 이전에 국민과 주권 개념에 대한 비판이며, 국민-주권-대표라는 근대 정치의 기본 도식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5)” 바로 이 주장이 이 책을 매우 급진적인 저작으로 만들고 있는데요, 민주
주의의 근본 정신을 실현하려면 국민과 주권이라는 근대 정치의 핵심 개념을 타파해야 한다, 그 개념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급진적 주장을 현실에서 수용하거나 실현하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국민과 주권을 빼놓고, 과연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을까요? 최소한 제도로서
말이지요.
“이처럼 근대 주권이론의 핵심이 초월성보다는 질성와 통일에 있었다면 보댕식 절대군주가
루소식 인민에 의해 처단되는 혁명기의 스펙터클은 생각보다 혁명적이지 않을 수 있다(57). 근대 주권
개념이 질서정연하게 통일된 신체의 염원 속에서 생겨난 것이라면 루소는 보댕을 타도한 만큼이나
완성시켰다고 볼 수 있도 있을 것이다(57).” 루소의 인민이 보댕의 절대군주와 연속선상에 있고,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매우 도전적이고 신선한 주장(민주주의=군주정 또는 귀족정)인 것
같은데, 어떻게 보시는지요?
핵심질문5.
이 책에서는 우리 현실 정치도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조명합니다. 예를 들어 이명박 정부가 민주정부인가
아닌가, 또는 민주주의가 후퇴했는가 아닌가 하는 논란이 한참 있었는데, 이 책도 그런 논쟁에서 나름의
독특한 견해를 내보이고 있습니다. 저자는 민주주의와 독재를 반대말로 사용해 온 그 간의 용법을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합니다. “현재의 상황을 들어 ‘민주주의의 후퇴’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현 정부의
독재 행태가 지난 민주화의 필연적인 결과는 아닐지라도 가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83)”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독재적 방식이 민주화의 결과라면 “현재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민주주의 복원인지 아니면
민주주의의 전화 내지 발명인지를” 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점에 대해 토론해봤으면 합니다.
두 분께서는 이 책의 주장대로 이명박 정부의 독재적 행태가 민주화의 결과라고 보십니까?
(또 민주주의의 복원이 아니라 전화 내지 발명이 필요하다고 보십니까?)
핵심질문6.
이 책에서 저자는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상당히 중요한 논점으로 삼고 있습니다.
저자는 최 교수의 논리를 한편으로 비판하고 한편으로 긍정하는 이중 전략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비판적
논점을 살펴보면, 최장집 교수는 민주주의의 성숙을 정당이라는 대의기구의 안착에서 찾고 있고,
그러면서 제도로서의 민주주의는 긍정하고 운동으로서의 민주주의 위험하게 보는데, 이것이 바로
문제라고 지적합니다. 쉽게 말해서, 2008년 대규모 촛불시위 같은 대중운동은 정당정치가 제대로
발달하지 못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탈선 또는 민주주의의 실패이라고 보는 것인데요, 이 점에서
최장집 교수가 민주주의의 제도화, 혹은 정당정치라는 대의제의 틀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
이 책 저자의 비판입니다.
더 나아가 이 책은 최 교수의 대의제 강화론, 정당 강화론을 비판합니다. 대의제 강화론이
“민주주의를 체제 안정화 시각, 다시 말해 넓은 의미에서의 공안의 시각에서 다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선진 사회에서 아직도 길거리 운동이냐’는 식의 공안 논리가 배어들 수
있다(104)”(광우병 촛불집회 때 실제로 그랬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주장에 공감하는 편인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핵심질문7.
그러면서 저자는 최장집 교수의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를 마냥 부정만 하지 않는데,‘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이론은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가 계속 문제가 된다는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이 책 저자의 기본 관점과 맞아들어가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민주화는 한판 승부가 아니고, 단계적으로 성숙해가는 것도 아니고,
매번 발명되고 때에 맞춰 전환되고 다시 도래해야 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라는 설정은 한국의 후진성을 나타내기는커녕 민주주의
일반의 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고 이 책은 주장하는데, 이런 주장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보기에 따라 저자의 이런 관점은 다소 추상적이거나 막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핵심질문8.
이쯤에서 최근 시민사회 혹은 정당제도 바깥은 유명인사들이 정치의 주역이나 현상으로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지 한번 고민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안철수 현상이라는 말이 최근에 신문과 인터넷을
휩쓸었는데요, 이런 현상은 최장집 교수의 논리를 빌리면 정당정치라는 대의제의 토대가 허약한 데서
나온 것 아닐까요? 안철수 현상을 국민대중의 탈정치 현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아니면 탈정당
현상이라고 할 수 있나요?
핵심질문9.
안철수 현상의 하위 현상이라고 할까, 이번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이른바 범야권 후보로 시민사회
출신 박원순 변호사가 등장했는데요, 이런 현상은 긍정적인 현상으로 봐야 할까요? 시민사회의
정치화라고 할 수 있는 현상이 시민사회의 고유 영역의 해체 내지 오염 아니냐는 비판적 시각도
있을 법한데요?
9월의 사회적독서토론은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고 깊이있는 토론이 이뤄진 시간이었습니다.
‘책읽는사회’ 독서토론은 시민들이 모여 책 읽고 토론하는 문화를 만들어내는 데
기여하고자 합니다. 다양한 실험과 변화를 준 토론형식을 통해 시민의 참여를 높이고
무엇보다도 질 높은 토론이 벌어질 수 있는 장을 열어가려고 합니다.
앞으로도 여러 선생님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 10월 26일 이달 마지막 주 수요일 7시에는『정치의 발견』(박상훈 지음) 독서토론이
있을 예정입니다.
~9월 28일(수) '책사회' 강의실 19:00 - 21:00~